[책의 향기]당신 곁의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9일 03시 00분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레이먼드 카버 지음·정영목 옮김/272쪽·1만6000원·문학동네

“그건 거짓말이야.”

미국 유명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의 단편 ‘거짓말’은 남편을 향한 아내의 항변으로 시작한다. 한 여성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아내의 주장과, 혼란스러워하는 남편의 모습이 교차한다. 고심 끝에 남편은 아내의 말을 믿으려 하지만, 아내는 돌연 태도를 바꾼다. “용서해줘요. 걔가 당신한테 말한 게 다 사실이야.”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던 여성의 말이 사실이라는 아내의 실토에 남편은 말을 잃는다.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탐구해온 카버는 ‘대성당’으로 1984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이번 소설집은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거나 절판된 단편 등 11편을 엮었다. ‘거짓말’과 ‘오두막’, ‘해리의 죽음’, ‘꿩’은 국내에 처음 번역됐다.

거짓말은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꿩에서 주인공 재럴드는 생일을 기념해 여자친구 셜리와 함께 해변에 있는 그녀의 집에 다녀오기로 한다. 운전 중 꿩이 출몰하고, 꿩은 차에 부딪혀 죽는다. 재럴드는 자신이 꿩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가속페달을 밟았음을 깨닫는다. 재럴드는 셜리에게 “당신은 나를 믿어?”라고 물으며 그가 무언가를 숨겨왔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가 숨겼던 건 살해충동이 아닌 피해의식이었다. 무명 배우 재럴드는 열두 살 연상의 부자 여자친구 셜리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 왔다. 잘나고 무관심한 여자친구에 대한 자격지심은 애꿎은 꿩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표제작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은 잘못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깬 부부의 이야기다. 밤을 지새우는 이들의 대화에선 서로를 향한 불신의 냄새가 풍긴다. 이들은 간밤에 꾼 악몽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잡다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의 꿈에 자신은 절대 등장하지 않는 게 찜찜하지만 묻어둔다. 잘못 걸려온 전화기 너머의 정체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맥락 없는 시작과 답답한 결말은 무한한 상상력을 허용한다. 속고 속이는 듯한 관계의 불안정함, 그 안에서 피어나는 공포는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단편 소설#인간의 내면#퓰리처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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