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 7일 노경실 동화작가(63)는 처음 만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주민 8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60, 70대인 쪽방촌 주민들은 모두 삶의 거친 굴곡을 경험한 이들. 장애를 지닌 이도, 기초생활수급자도 있다. 노 작가가 주민들에게 권한 건 ‘글쓰기’다. 노 작가는 “글을 쓰기 어려우면 내게 말로 인생을 불러 달라”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주민들도 조금씩 변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주민은 말로 자신의 과거를 풀어냈고, 타인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자신감 없던 주민은 자신의 인생을 적었다.
이달 15일 출간된 에세이 ‘우리들의 인생책’(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은 4월부터 10월까지 돈의동 쪽방촌 주민 8명이 노 작가의 도움을 받아 쓴 책이다. 최선관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이 노 작가에게 글쓰기 강의를 요청해 이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출간은 현대엔지니어링이 후원했다. 어떻게 주민들의 마음을 열었냐고 묻자 노 작가는 25일 통화에서 담담히 말했다.
“처음엔 주민들에게 이름을 써보라고 했어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에 아름다운 뜻이 담겼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인생을 돌아볼 용기가 생기거든요. 그 다음에 귀를 열고 있었더니 주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더라고요.”
신간엔 쪽방촌 주민들의 인생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A 씨는 결혼생활을 했던 40 대까진 행복했지만 50대부터 불행이 시작됐다고 고백한다. 그는 “인생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며 자신이 직접 지은 시 한 편을 책에 실었다.
‘지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 흘러간 세월에 눈물 짓지 마/ 서러운 시간 속에 이슬이…/ 지내온 과거를 이제는/ 떨쳐버리고 웃으리’(A 씨의 시 ‘내 인생의 노래’ 에서)
용기 있게 슬픔을 마주한 이도 있다.
B 씨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작두에 손가락 하나가 잘려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스물네 살에 시집갔지만 남편은 노름에 빠졌다. 빚에 시달리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뒤 혼자서 식당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고생이 끝났다 싶었지만 모아둔 돈도, 집도 없어 집세가 싼 돈의동으로 오게 됐다. 그럼에도 B 씨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돈의동 쪽방촌은 정이 넘치고 따스함이 있다.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내 인생도 활짝 꽃이 필 것 같다.”(B 씨 에세이 ‘돈의동과 나, 나의 돈의동’에서)
친부모에게 버려져 방황했다는 한 주민은 동물에게 사랑을 받은 기억을 발판삼아 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새 꿈을 고백한다. 집안 경제 사정이 힘들어져 절망했다는 다른 주민은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품어주는 인생이 되고 싶다고 노래한다.
알코올중독에 빠진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 이도, 지금은 헤어진 아내에게 사죄의 글을 실은 이도 있다. 자신을 못살게 굴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은 이도 있는 반면 지금 키우고 있는 강아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
25일 한 주민에게 전화로 ‘글쓰기’ 소감을 물었다. 이 주민은 어엿한 작가처럼 말했다.
“글 쓰는 동안 거울에 제 과거가 비치더군요. 거울 속 제 모습은 희비(喜悲)가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인생은 웃으며 살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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