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을 앞둔 노(老)배우가 신인연출가에 도전한다. 배우 이순재(87)가 현역 최고령 배우에 이어 '최고령 신인연출가' 타이틀까지 갖게 된 것. 그는 21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연극 ‘갈매기’에서 연출가 겸 배우(소린 역)로 관객과 만난다. ‘갈매기’는 ‘벚꽃 동산’ ‘세자매’ ‘바냐 아저씨’로도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이다.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에서 지난달 29일 만난 그는 “‘갈매기’는 원작을 훼손하거나 변형하면 작가의 정신 혹은 문학성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작품이다. 배우의 훌륭한 연기로 명대사를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작품의 진수가 드러날 수 있다”고 말했다.
‘갈매기’의 중심인물은 작가지망생 뜨레블례프(정동화 권화운)와 배우지망생 니나(진지희 김서안), 유명작가 뜨리고린(오만석 권해성), 뜨레블례프의 어머니인 유명배우 아르까지나(이항나 소유진)까지 4명이다. 치정으로 얽히는 넷의 관계를 통해 구세대와 신세대,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 선명히 드러난다.
“갈매기는 체호프가 제정 러시아 말기라는 구체제에선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에서 쓴 작품이에요. 구세대에게 짓눌려 날아오르지 못하는 신세대가 주인공이죠. 갈매기를 썼을 당시 체호프는 서른 여섯이었어요. 사회적 제약, 모순, 갈등이 훤히 보이는 나이죠. 또 욕망은 있지만 현실적인 한계로 이를 마음껏 펼칠 수 없는 나이기도 합니다.”
희곡의 원제 ‘갈매기’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물에서 날아오르고 싶지만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새. 기성세대를 떠나려 날갯짓하지만 끝내 떠날 수 없는 젊은 세대를 은유한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만 냉엄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는 인간의 고뇌를 의미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굉장히 우수합니다. 용모, 체격, 두뇌…. 한마디로 종족개량이 됐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이념과 편견, 갈등을 젊은 세대에 오염시키면 안 됩니다. 우린 이미 오염된 세대예요. 그들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우리는) 토대만 마련해주면 됩니다.”
그는 스스로를 신인연출가라 하지만 사실 연출 경력은 오래 전 시작됐다. 1980년대 극단 사조에서 ‘수전노’ ‘환상살인’ ‘달려라 토끼’ ‘가을소나타’를 연출하고 20년 전부터는 세종대, 가천대에 출강하며 학생들과 연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연출가로서 관객에게 제대로 작품을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연출가에겐 창의력, 응용력만큼이나 해석력이 필요합니다. 연출가라고 해서 작품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려도 된다는 게 아니에요. 원작을 제대로 구현한 후 자기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거죠. 연극은 관객과 소통하는 작업이기에 처음 보는 관객도 단박에 내용을 알 수 있게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시절 대학 연극반에서 연극을 시작한 그는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66년차 배우다. 지난해엔 86세의 나이로 ‘국내 최고령 리어왕’을 연기한 기록도 세웠다.
“연기엔 끝이 없습니다. 완성도 없죠. 새로운 도전과 창조, 노력만 있습니다. 조금 더 잘하는 사람, 더 오래한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게 연기의 끝이고 완성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아직 끝을 보진 못했어요. 성한 몸으로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진 해보려 합니다.” 내년 2월 5일까지, 6만~9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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