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A PD와 작가 8명이 모인 화상회의에서 PD가 말을 꺼내자 채팅방에 “알겠습니다”는 답이 이어졌다. 이후 의견을 조율했고 독자가 읽고 싶은 얘기가 최우선이란 점에 다들 동의했다. B 작가는 “처음하는 경험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화상회의는 최근 웹소설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집단 창작을 위한 모임. 집단 창작은 소설가 1명이 글을 쓰는 순수소설과 달리, 여러 웹소설 작가들이 협업해 작품을 쓰는 방식이다. 동아일보는 웹소설 ‘마이 윈터, 눈 속에서 깨어날 때’ 집단 창작을 위한 회의에 직접 참여했다.
10명이 모인 회의는 PD의 지시에 따라 독자 분석부터 시작했다. 기자도 나이대와 남녀로 분류된 엑셀 파일에 해당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소재를 적어넣었다. “10대 남성은 게임과 교우 관계, 20대 여성은 소셜미디어와 판타지, 회귀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C 작가는 “20대 여성은 로맨스, 30대 남성은 직업물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줄거리도 함께 정했다. PD가 모험, 복수, 유혹 등 14개의 키워드를 제시하자 작가들은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주인공이 어떻게 숨지는가에 대한 토론에서 기자는 “사회 현안을 녹여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모두 동의했고, 한 작가가 최근 벌어진 ‘공장 노동자 사망’을 모티브로 떠올렸다.
25일부터 진행된 회의는 28일까지 기획을 다듬고 줄거리 및 캐릭터를 정하는 데 총 10시간이 걸렸다. 진행은 모두 온라인으로 했다. 본격적인 창작은 이런 모든 과정이 결정된 뒤 진행된다.
지금까지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르는 요즘 웹소설에서 가장 핫한 주제인,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 회귀물. 2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해 여성이 주인공인 로맨스 판타지 장르로 정했다.
‘22세 여성 인아는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인아의 유일한 낙은 웹소설 읽기. 기계를 청소하며 몰래 소설을 읽던 인아는 실수로 사고가 벌어지며 숨을 거둔다. 그런데 눈을 뜬 인아는 자신이 그동안 읽던 웹소설 속 백작(伯爵)의 막내딸 아드리안 아리엔으로 환생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소설 내용을 알고 있는 인아는 이 세계에서 천하무적. 인아는 대공(大公)의 후계자 비엘 카이언을 도와 권력의 핵심부에 다가간다.’
이런 집단 창작을 통해 히트친 웹소설이 많다. 누적 조회 수 1억8000만 회를 넘긴 ‘전지적 독자 시점’은 작가 부부가 공동 작업했다. 작가 6명이 참가한 ‘이혼도 A/S가 되나요?’처럼 집단 창작은 일상화됐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최근 집단창작 시스템으로 유명한 북미 웹툰 플랫폼 ‘래디쉬’를 5000억 원에 인수하며 집단창작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웹소설에서 집단 창작이 보편화된 건 효율성 때문이다. 웹소설은 거의 매일 연재해야 해 작가는 하루 5000자 이상, 한 달에 15만 자 넘게 쓴다. 이로 인해 체력이 떨어진 작가들이 연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한 웹소설 작가는 “집단 창작은 작품 집필 속도가 1인 창작보다 훨씬 빨라 ‘펑크’ 날 일이 적다”고 했다. 또 다른 작가는 “혼자 할 때보다 다양하고 신선한 의견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때문에 집단 창작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저작권에 대한 갈등을 막기 위한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학수 웹소설PD협회장은 “창작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이견(異見)을 조율하는 제작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반영하되 작가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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