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 ‘시드볼트’ 르포
경북 봉화 국립수목원 ‘시드볼트’… 4900여 종자-17만8000점 저장
산불 대비해 숲 전체 보존 계획도… 천연기념물 나무들 태풍 등 피해
문화재청과 보존 프로젝트 시동… “5년간 노거수 종자 179점 저장”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난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말을 한 이가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인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있는 ‘시드볼트’다. 말 그대로 ‘씨앗(Seed) 금고(Vault)’인 이곳은 인류가 최악의 재난 상황을 맞을 경우에 대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식물 종자를 안전하게 간직하려는 일종의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는 세계에 딱 두 곳밖에 없다. 노르웨이와 한국이다.
종자 보존이야 많은 나라가 하고는 있지만, 지하 60m에 최첨단 시설을 갖춰 ‘금고’의 성격을 지닌 시설은 두 나라뿐이다.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가 주로 작물종자를 저장하는 걸 감안하면, 야생식물종자를 영구 보존하는 시설은 우리나라의 시드볼트가 유일하다.
시드볼트는 올해 또 다른 ‘세계 유일’ 타이틀을 달게 됐다. 그간 과학적 관점에서 야생식물종자를 보존해오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천연기념물 종자도 보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과 시드볼트는 올해 4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의 종자를 영구 보존하는 협약을 맺었다.
기자는 7일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있는 시드볼트운영센터를 찾아 ‘시드볼트 천연기념물 보존 프로젝트’를 살펴봤다.
지상에 있는 시드볼트운영센터는 외부에 제한적으로 개방하지만 지하 시설은 관계자 외에는 접근할 수 없다.》
○ “위기 처한 천연기념물 종자 지켜야”
시드볼트는 지하 깊숙한 터널에 3중 철판 구조로 지었다. 전기와 통신이 모두 끊겨도 실내기온이 10∼15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평상시엔 영하 20도를 유지해 종자가 발아하거나 썩지 않는다. 기온 변화에 취약한 지상의 종자보존시설들보다 훨씬 안전하다.
2019년 국가보안시설로 지정된 시트볼트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에도 잡히지 않는다. 이동경로 데이터를 자동 수집하는 테슬라 차량은 진입이 금지돼 있다. 2015년 12월 완공돼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드볼트에는 현재 4900여 종, 17만8000여 점이 저장돼 있다. 보안을 위해 1년에 4번, 분기별로 한 번씩만 종자를 입고할 정도로 경계도 삼엄하다.
시드볼트운영센터 1층에 있는 종자건조실에는 베이지색 냉장고처럼 생긴 기기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종자 저장 업무를 담당하는 김진기 대리는 “‘경북 울진 행곡리 처진소나무’ 등 천연기념물인 노거수(老巨樹·수령이 많은 대형 나무) 종자 20여 점이 이달 말까지 들어갈 것”이라며 “시드볼트에 보존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부터 5년 동안 천연기념물 노거수 전체의 종자 179점 모두를 시드볼트에 저장할 계획이다. 한반도의 희귀 야생식물종자 등을 보존하는 데 집중했던 시드볼트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천연기념물 종자 보존에 문을 연 것이다.
“사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은 야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종은 아닙니다. 179그루 가운데 은행나무가 25그루로 가장 많고 느티나무(19그루), 소나무(15그루)가 그 뒤를 잇습니다. 국내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죠. 희귀성이 보존 기준이 된다면,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우선순위가 절대 높지 않아요.”(배기화 시드볼트운영센터장)
하지만 최근 산불과 태풍 등 자연재해로 소실되는 천연기념물이 늘자 인식이 바뀌었다. 하루빨리 종자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2019년 태풍 링링으로 완전히 부러진 경북 합천 ‘해인사 전나무’가 대표적이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이 해인사를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의 후계목으로, 1757년경 심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수령이 250년이 넘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올해까지 최근 5년간 해인사 전나무 등 천연기념물 노거수 두 그루가 태풍 피해로 부러져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고 밝혔다.
게다가 지난해 초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에는 천연기념물인 강릉 오죽헌의 매화나무 ‘율곡매(栗谷梅)’가 고사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한바탕 난리가 났다.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율곡매는 1400년경에 심어져 수령 6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 등으로 2017년부터 꽃이 줄어들고 가지가 마르더니 결국 봄철에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줄기는 살아있지만 언제까지 버텨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이에 시드볼트와 문화재청은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자연유산이라는 점에 공감했다. 이원호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학예연구관은 “전국의 천연기념물 노거수 179건은 대부분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역할도 해왔다. 한반도의 공동체를 지탱해 온 문화유산을 시드볼트에 영구 보존해 후대에 전하자는 게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고 했다.
○ 인공종자 배양 세계 최초 시도
프로젝트는 초기에 꽤나 난항을 겪었다. 종자 자체가 열리지 않는 천연기념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에 있는 ‘서울 문묘 은행나무’가 대표적이다. 현재 수나무만 있어 더 이상 종자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 함께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령이 최소 400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 높이 21m, 가슴 높이 둘레 7.3m인 나무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한국의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나무를 후대에 전할 방법은 없는 걸까.
현재 시드볼트와 문화재청은 해당 나무를 대상으로 체세포 배아 캡슐을 이용해 ‘인공 종자’를 만들기 위해 협의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시드볼트에 연구용역비를 지원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종자 인공배양 연구에 나설 계획이다. 이 연구관은 “천연기념물 종자를 인공 배양해 시드볼트에 영구 보존하는 최초의 사례”라며 “앞으로 종자가 열리지 않아 보존이 어려웠던 천연기념물을 보존할 새로운 길이 열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목표는 숲 전체의 보존이다. 노거수뿐 아니라 ‘경북 울릉군 성인봉 원시림’과 같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림(樹林) 24곳의 나무 종자들도 시드볼트에 보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배 센터장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림은 단 한 번의 화재로도 숲 전체를 잃을 수 있다”며 “5년간 노거수 179건의 종자를 보존한 뒤엔 수림 종자를 보전하는 것을 새로운 5년 과제로 수립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반도의 숲은 잦은 산불 피해로 위기에 처해 있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해예측·분석센터에 따르면 올해 10, 11월 발생한 산불 건수는 총 70건으로 과거 10년 같은 기간 평균(34건)의 2배가 넘는다. 연중 산불 피해가 가장 많은 1∼4월 역시 올해는 477건으로, 지난 10년 같은 기간 평균(320건)보다 급증했다.
“산불 발생 위험과 상관성이 높은 기후 인자인 해수면 온도가 올해는 예년보다 더 높아졌어요. 상대 습도는 낮아졌고요. 불이 더 자주 나는 상태가 된 거죠. 지구온난화가 잦은 산불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예요. 한반도의 야생식물들이 지구온난화로 살아갈 터전을 잃고 있는 거죠. 이들을 더 잃기 전에 종자 보존을 서둘러야 합니다.”(배 센터장)
○ “세계 미래세대 위한 ‘노아의 방주’ 되길”
시드볼트에서 일하는 이들은 “더 이상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 대리는 “한 해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씨앗 하나를 얻는 데만 최소 4, 5개월이 걸려 자칫하면 멸종위기를 막기 위한 보존 시기를 놓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야생식물자원의 종자가 열리는 철마다 현장을 찾아가 직접 종자를 딴다. 과일나무라면 과육을 제거한 뒤 시드볼트운영센터 1층 건조실에서 최소 3, 4개월간 씨앗을 건조시킨다. 엑스레이실이 눈에 들어왔다. 김 대리는 “씨앗의 속이 꽉 찼는지 혹은 비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데이터를 기록한다”고 했다. 훗날 이 종자를 땅에 심을 후손에게 정확한 정보를 남기기 위해서다.
시드볼트는 종자가 싹을 틔우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와 빛의 양을 찾는 데도 분주하다. 미래 인류에게 ‘발아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서다. 해당 연구를 하는 종자생리연구실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온도와 빛의 조건을 제각각 설정할 수 있는 장비인 ‘발아 체임버’에서 종자의 발아 상태를 실험하고 있었다. 발아 체임버 위에 붙은 종이에는 올해 2월부터 지난달 18일까지 진행한 연구 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금은 ‘개구리발톱’과 ‘섬초롱꽃’ 등의 종자가 싹을 틔우는 환경을 찾고 있다.
“데이터는 종자와 함께 시드볼트에 영구 저장되는 핵심 자료예요. 시드볼트에서 종자를 꺼내 심어야 할 때가 오면 이런 실험을 할 여유가 없을 거니까요. 아직 시간이 주어진 우리 세대가 미래 아이들을 위해 싹을 틔우는 비법까지 전수해줘야 하는 거죠.”(이하얀 시드볼트 총괄팀장)
한국의 시드볼트는 한반도 생태계 보존만을 위해 일하진 않는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세계 미래 세대를 위한 ‘노아의 방주’가 되는 것이다. 종자보관소에는 지하 깊숙한 시드볼트에 들어가기 전에 건조 등 사전 처리를 하는 종자들이 있다. 두 겹으로 된 육중한 문을 차례로 열고 들어가자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시드볼트와 똑같은 영하 20도, 습도 40%를 유지하고 있는 것. 꽉 차 있는 큰 책장들에는 종자들이 보관돼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블랙박스가 5개씩 쌓여 10줄로 늘어서 있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종자 박스 50개였다. 시드볼트가 중앙아시아 4개국과 종자 보존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박스별로 ‘우’ ‘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각 나라 이름의 첫 글자를 써 구분한 것이다.
시드볼트는 종자 200만 점을 넣을 수 있는 현재 공간이 다 찰 경우를 대비해 두 개의 지하터널을 더 뚫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둔 채로 설계됐다. 김 대리는 “내가 퇴임할 때까지 새로운 터널을 뚫는 것이 목표”라며 웃었다. 이어 말했다.
“저장된 종자는 어쩌면 우리 세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최근 100년간 지구를 병들게 한 책임은 인류 모두에게 있습니다. 시드볼트는 이런 현실을 만든 것에 책임을 지는 일이자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될 겁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