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이 한반도 상공을 처음 비행한지 100 주년
일본도 극찬했던 조선의 천재 파일럿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통해 민족의 자긍심 일깨워
독립운동 중 30살에 사망
1922년 12월 10일 낮 12시. 한강의 매서운 칼바람에도 5만 명 구경꾼들이 여의도 비행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구경꾼들의 눈을 일제히 몸체 양쪽에 조선 13도 지도가 그려진 1인승 단발 쌍엽기로 향했습니다. 이름은 ‘금강호’.
12시 22분 우렁찬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금강호는 활주로를 내달리며 경성(京城)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한반도 하늘을 조선인이 최초로 비행한 순간이었죠. 환희와 감동에 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복받치는 감정을 참다못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5만 관중(당시 경성 인구의 6분의 1)은 목이 터져라! 조종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은 안창남(1901∼1930). 한국 비행사(史)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의 한 장면입니다.
오늘 12월 10일은,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떴다떴다변비행에서는 민족이 낳은 천재 파일럿 안창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민족의 천재 조종사
1913년 8월 29일 용산에서 열린 일제 해군 나라하라 산지의 곡예비행은 열두 살 안창남의 삶을 뒤바꿉니다. 한반도 상공을 난 최초의 인물이 일제 장교라는 사실에 억울하면서도, 그는 “저까짓 것 나도 배우면 저만큼은 넉넉히 할 것”이라며 혀를 찼겠지요.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었던 그에게 비행술은 일종의 삶의 구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행술에 빠져있던 안창남은 1917년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면서 본격적인 비행사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휘문고(휘문의숙) 3학년 시절인 1919년 몰래 3000원 (현 가치 약 3억 원)을 들고 일본으로 갑니다.
당시의 비행기는 자동차와 구동 원리, 장비, 정비 등이 상당히 비슷했다고 합니다. 안창남은 일본에서 먼저 자동차 기술을 배웠습니다. 안창남은 비행기 정비와 조립 등을 스스로 할 줄 알았는데, 자동차 기술을 배웠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분석입니다.
1920년 8월 안창남은 일본 도쿄 오쿠리비행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3개월 만에 3등 비행사 면허를 딴 데 이어 1921년 5월엔 2등 비행사 면허증도 땁니다. 승승장구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안창남은 1921년 6월 일본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을 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무시험 1등 비행사 면허까지 딴 것을 넘어, 내로라하는 일본인들을 제친 그에 대해 일본에서도 “타고난 천재”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
소파 방정환 선생도 안창남과 인연이 깊습니다. 안창남과 초등학교 동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잡지 ‘개벽’의 일본 특파원으로 활동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안창남의 활약을 고국에 소개하기도 했죠. 안창남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안창남은 고국에서도 큰 인기를 끕니다. ‘청춘가’라는 민요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가사를 입힌 구전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죠. 구전 민요들에 ‘안창남’ 이야기를 넣어 개사해 부르는 것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고국 비행이 있기 한 달 전인 1922년 11월 안창남은 또 한 번 천재적인 실력을 과시합니다. 일본 제국비행협회에서 시행한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했는데, 비행기를 구하지 못해서 몇 차례 참가를 철회해야 했죠. 가까스로 150마력 비행기를 빌렸는데, 이마저도 고장으로 방치돼 있던 비행기였습니다. 강나진 국립항공박물관 학예사는 “지인들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참가를 말렸다. 그런데 안창남은 ‘조선인으로서 내가 여기서 포기를 한다면 뭐가 되겠느냐. 나는 사내니까 한번 신청해보자’라고 해서 결국 대회에 참가했다”고 말했습니다.
우편 비행대회는 도쿄에서 오사카를 가는 대회였는데요, 한 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도쿄-시즈오카현 미시마-아이치현 도요하시-시가현 요카이치-오사카 등 5곳을 거쳐야만 성공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가 빌린 비행기는 다른 참가자들의 것보다 성능이 크게 떨어졌지만, 안창남은 왕복 비행에 성공했고 최우수상을 받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는 그의 성공 소식과 사진을 대서특필하기도 했죠.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안창남의 가슴 속엔 “조선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의 고국 방문 비행을 주최했는데요. 그는 고국 방문 비행에 앞서 동아일보에 수기를 보내 비행의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남들보다 낫다는 신념을 두텁게 해주기 위해”
고국을 사랑했던 청년
그런데 일제 또한 안창남의 고국 비행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일본 보수 단체 회원 1000여 명이 그의 귀국을 환영하기도 했죠. 일본계 언론도 비행 성공을 기원했고, 심지어 사이토 조선총독이 관저에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일본 항공국은 물론 조선총독부, 군사령부, 평양항공대도 그의 비행을 지원했죠. 아이러니한 일본의 행동에는 속내가 따로 있었습니다.
일제는 안창남을 통해 그들의 항공 및 군사 기술을 홍보하고, 그를 앞세워 식민 통치를 미화하려 했던 것이죠. 그런데 안창남은 이를 간파라도 했던 것일까요? 그는 고국 방문 비행에서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을 남깁니다. 안창남은 1923년 1월 월간지 ‘개벽’에서 그날의 비행을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경성의 한울! 비행장에서 1100m 이상 높직이 뜨니까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 열어노코 기다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가티 반가웠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 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었을는지. ‘어떠케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빼앗긴 하늘에서 조국을 내려다본 안창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는 여의도에서 이륙해 오늘날의 마포-공덕-서대문, 독립문-평동(안창남의 고향)-광화문-경복궁-창덕궁-동대문-종묘-남대문을 날았습니다. 그는 순종이 칩거하던 창덕궁 상공도 선회하며 예를 표하기도 했죠.
강나진 학예사는 “안창남 선생님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눈이 쌓인 초가집을 보고서 ‘무덤’과도 같아 보였다고 속상해했다”며 “당일에 15분~20분 정도 비행을 하고, 그다음에는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인천까지 비행하면서 총 3회에 걸쳐 고국 방문 비행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행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안창남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 비행기를 발명했던 선조의 피가 혈관에 흐르니 우리도 노력하면…’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기도 했죠. 이진형 국립항공박물관 학예관은 “5가지 색의 오색 전단을 3회에 걸쳐서 만 여장을 뿌렸다. 조선인도 뛰어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려는 시도였다. 일본이 원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조선인들의 긍지가 커졌다. 안창남을 주제로한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만 봐도, 안창남이 퍼뜨린 영향력은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창남은 일본의 술수에 부응하지 않았던 겁니다. 비행 기술을 선보인 것을 넘어 동포들의 가슴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의지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죠. 원래 고국 방문 비행은 평양과 개성, 대구, 부산, 신의주 등에서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모두 취소가 됩니다. 비행기 상태가 좋지 않아서 비행이 취소됐다고 알려졌지만, 안창남의 심상치 않은 인기와 그가 전단을 뿌려가며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키워준 것을 본 일제의 뒤끝 때문 아니었느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길
부와 명예가 보장됐지만, 안창남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합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대 학살 사건을 보면서 독립 투쟁에 헌신하기로 한 것인데요. 일제의 눈을 피해 1924년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중국군에 들어가 비행사와 항공군 사령관으로 활동했고 항공대 비행학교 교관도 역임합니다. 사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테러와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안창남이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퍼졌고, 조국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안창남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반인이 미쳐서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망 소식은 오보로 판명됐고, 안창남은 그를 걱정하는 친누나를 보려고 고국을 방문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데요.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던 겁니다.
그는 1928년엔 비밀결사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 조직을 주도했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기도 하거니와 독립운동은 철저히 비밀로 이뤄진 것이 많았고,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이죠. 1929년 대한독립공명단이 중국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수집을 위해 경성 우편 차량 습격 사건 주도한 일이 있었는데요. 당시 대한독립공명단장 이름이 안혁명(安革命)이라고 알려지는데, 학계에서는 안혁명이 안창남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의 활약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다른 조선인 비행사들에게도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비행사관학교를 세워 여기서 배출되는 조종사들을 통해 독립 투쟁을 하고 싶어 했죠. 1927년엔 비행학교 건립을 위해 300여만 평의 땅을 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일본을 이기는 길은 비행술을 익히는 것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죠.
그러던 1930년 4월 2일 안창남은 새로 도입한 비행기를 운전해 보려고 탑승합니다. 그런데, 비행 도중 엔진 문제로 산에 추락해 유명을 달리합니다. 이때 나이가 겨우 30세였습니다.
이진형 학예관은 “후학 교육을 위해서는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만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새로운 기체가 하나 들어온다. 본인 스스로 기체를 확인하고 첫 번째 비행을 했는데, 그 비행에서 안타깝게 하늘의 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안창남의 유해를 아직도 수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사고 당시에 안창남을 수습했고 묘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창남의 묘를 봤다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중국 타이위안시에 안창남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은 됩니다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묘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쉬운 것이 또 있습니다. 2001년 그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훈장과 애국 증서가 아직도 국가보훈처에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는 건데요. 국내법에 따라 후손들이 훈장과 애국 증서를 받아가야만 세상에 나올 수가 있는데, 안창남은 후손이 없어서 (친누나도 이후의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훈장과 증서를 아무도 받아 가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국립항공박물관이 훈장과 증서를 같은 모양으로 본떠 가지고 있어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올해는 그의 고국 방문 비행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안창남은 민족이 낳은 천재였고, 조국을 사랑했던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지극 히 평범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가르침을 하늘에 남긴 영웅이었죠. 국립항공박물관에서 12월 11일까지 안창남 특별전이 열립니다. 100주년에 맞춰서 기사를 쓰다 보니 특별전 날짜가 하루 밖에 남질 않았습니다. 주말을 이용해서 국립항공박물관에 가서 안창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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