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는 남성 중심 사회지만, 내방가사를 통해 여성의 공간이 ‘안방’에서 ‘바깥세상’으로 확대되는 걸 감지할 수 있어요. 점차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여성의 인식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내방가사는 주로 부녀자들이 한글로 지은 ‘여류문학’의 일종이다. 지난달 26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내방가사에 대해 이정옥 위덕대 자율전공학부 명예교수(66·사진)는 “당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사료”라고 평했다.
1980년대부터 내방가사를 연구해온 이 교수는 “가부장적 유교문화 아래 억압당했다고 여겨졌던 16∼17세기 동아시아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냈다는 점이 등재에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2015년 남편인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과 함께 내방가사 292점을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내방가사가 처음부터 여성의 주체성이 돋보였던 건 아니다. ‘주자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시집가는 딸에게 덕목 등을 가르치고자 ‘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란 책을 지었다. 사대부 예절을 중시한 경북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이런 내용을 4.4조 형식에 담은 가사가 내방가사의 초기 형태였다. 하지만 이후 여성의 주체적 의식 등을 담은 내용이 많아졌다.
“이후 유람가 등을 보면 ‘이런 놀음을 남성들만 하느냐’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등 자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많아요. 퇴계 이황(1501∼1570)을 상찬한 ‘도산별곡’이나 조선 역사를 다룬 ‘한양가’ 등 남성이 쓴 글을 여성들이 내방가사로 향유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방가사에는 곤궁해진 서민들의 애달픈 삶도 묻어난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3번이나 재가하지만 경제적으로 몰락해 유랑하는 여성을 다룬 ‘덴동어미 화전가’가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조선 후기 가혹한 징세와 수탈로 서민들이 어떤 궁핍을 당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수작”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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