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 10일, 경성 하늘로 ‘금강호’라는 이름의 1인승 단발 쌍엽기 한대가 떠올랐다. 조종사의 이름은 안창남(1901~1930).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비행한 순간이었다. 동아일보가 후원해 열린 이날의 비행은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만인 최초의 비행사인 사문달(1901~1983)이 친구 안창남을 회상했던 기록이 공개되면서 그의 삶도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은 10월 27~28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서울호텔에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사문달의 손녀인 사안이 씨(69)도 초청됐다. 본보는 13일 사안이 씨가 가져온 대만 다큐멘터리 ‘尋找(심조)1920’과 사문달의 아들 사동한 씨(92) 인터뷰 자료를 입수해 안창남의 일생을 되돌아봤다.
안창남은 1920년 8월 일본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사문달을 만난 것도 이 곳에서다. 둘은 각종 비행대회에 참석하면서 비행을 익히고 우정을 나눈다. 안창남은 일본에서 열린 각종 비행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일본인들로부터 “타고난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다. 1922년 고국 방문 비행 후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사동한 씨는 “아버지와 안창남은 금방 친해져 술도 자주 마셨다”면서 “안창남은 매우 검소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안창남이 돈을 모아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썼다고 기억한다”고 했다. 안창남은 실제 비행사 양성 등 항공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1924년경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산시군 옌시산 군벌에 들어가 후학 양성에 힘쓴다.
사동한 씨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안창남과의 이별을 다음처럼 기억했다.
“1928년 쯤 아버지는 ‘높이 나는 새들은 그에 걸맞은 나무를 골라야 한다’면서 자신이 있던 장제스(대만 초대 총통) 산하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하지만 안창남은 자신을 거둬준 사람들을 배신할 수 없다며 의리를 지켰죠.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안창남과 사문달은 1930년 쯤 하늘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사문달이 정찰 비행을 하던 중 적군으로 보이는 비행기와 마주쳤는데 안창남의 비행 패턴과 비슷했다고 한다. 사동한 씨는 “안창남과 아버지는 평소 술을 마실 때 가위바위보처럼 하던 손 제스처가 있었다”면서 “아버지가 그 제스처를 하니 안창남도 손짓으로 응답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어 “적군이었지만 서로를 알아보고서 몇 분간 같이 비행한 것이 둘의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새 비행기를 시험 비행하던 중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사동한 씨는 “어머니가 어느 날 펑펑 울고 계시던 아버지께 왜 우냐고 물으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안창남이 죽었다’고 말했다고 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는 걸 그 때 처음 봤다고 한다”고 했다.
안창남이 중국에서 활동한 기록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사망한 후 유해를 수습해 묘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는데, 안창남에겐 이를 대신 받을 후손이 없다. 훈장과 증서가 아직 국가보훈처에 있다. 이진형 국립항공박물관 학예사는 “안창남의 활약을 다룬 기록이 많이 없는데, 사문달의 증언은 매우 귀하다. 일본과 중국 등에도 자료가 더러 있을 텐데 앞으로 많은 이야기가 발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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