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2016년)에서 은희는 서울 서촌에서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와 마주친다. 애정 문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하루의 끝자락, 은희는 남산에서 다시 료헤이와 만난다. 짧은 영어로 간신히 소통하던 은희는 료헤이에게 일본어로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한다. 료헤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다음 내용이다.
당나라 여동빈(796∼?)의 시다. 여동빈은 신선 종리권을 만나 인간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고 신선이 된 인물이다. 악양루의 삼취정(三醉亭)이란 명칭도 악양루에서 세 번 취했다는 이 시와 관련 있다. 신선 그림에서 여동빈은 검과 함께 그려지곤 하는데, 시에도 북에 번쩍 남에 번쩍하며 소매 속으로 푸른 뱀을 불러들여 검으로 만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시를 우리 선조도 좋아했다. 조선 후기 화가 양기성은 이 시를 화제(畫題)로 삼아 여동빈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洞庭飛吟’)
료헤이가 이 시를 읊조린 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동화 ‘두자춘’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 전기소설 ‘두자춘전’을 윤색한 것으로, 동화에선 신선 철관자가 이 시를 읊는다. 아쿠타가와가 원작에 없던 여동빈의 시를 넣은 것이다. 동화 속 두자춘은 염량세태에 좌절해 속세를 초월하길 바랐지만 결국 신선이 되지는 못한다. 두자춘은 철관자에게 인간답게 정직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영화 속 남녀는 최악의 하루를 보낸 뒤 진심과 진짜를 이야기하며 해피엔딩을 꿈꾼다.
영화는 공간과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은희는 서촌과 남산을 오가며 과거와 현재의 연인을 만나 거짓말을 한다. 그녀의 진심과 거짓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그렇게 운(?) 나쁜 최악의 하루를 끝낼 무렵 료헤이의 말이 은희에게 위안을 준다. 감독은 한시를 읊는 일본어의 어감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낼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아시타니 홋카이니 아소비 쿠레니와 소오고”로 시작되는 료헤이의 시 낭송은 뜻으로 한시를 읽는 일본 특유의 훈독(訓讀) 방식이다. 글자 순서대로 음으로 읽는 한국과 중국의 음송 방식과 다르다. 외국어로 읊는 뜻밖의 한시를 통해 관객 역시 왠지 모를 안온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도 삶에 지친 어느 날 료헤이가 읊조리던 시가 적힌 여동빈 그림(리움미술관 소장 ‘萬古奇觀帖’)과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보면 필연일 때가 있는 것처럼, 한중일 사람들의 정신적 유전인자에 남아 있던 한시의 DNA가 동화와 영화를 거쳐 다시 우리 앞에 현현한다. 이렇게 영화로 한시를 읊는 일 역시 우연을 빙자한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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