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문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한 조선 중기 시인이자 화가인 허초희(1563∼1589). 시 300여 수를 비롯해 많은 산문도 남겼지만 그의 이름은 다소 생소하다. 실은 허초희의 호는 난설헌으로 홍길동전 저자인 허균(1569∼1618)의 누이 허난설헌이다.
사실 조선시대 여성은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5만 원권 지폐의 주인공인 신사임당(1504∼1551) 역시 호가 사임당으로, 본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부인이나 어머니, 딸로 기억된다. 이름이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 기록엔 남지 않는다.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여성들. 하지만 그들의 존재까지 지워질 순 없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인 저자는 “여자가 없는 세상이란 없다”고 강조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3000여 편의 조선시대 문헌을 분석해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또 당대 여성들의 삶과 관련된 오해와 진실을 구체적 사료를 통해 밝히려 노력한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문자교육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됐다. 어릴 때부터 문자를 배우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여성들은 남성이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이를 외워서 글을 공부하기도 했다. 경전이나 선조가 남긴 책을 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역경에도 다양한 책을 섭렵해 학문에서 상당한 진척을 이룬 여성이 적지 않았다.
아울러 저자는 18∼20세기 ‘열녀(烈女)’와 관련된 자료를 분석해 열녀가 되길 강요한 당대의 분위기를 살폈다. 저자는 당시 모범적인 여성상으로 간주하던 열녀라는 개념을 강하게 비판한다. 여성의 주체성과 생명권을 남편에게 종속시켰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유 구조는 여성의 성에 대한 주권이 남편에게 있다는 발상을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여성에게 힘겨운 시대였지만 당대에도 여성들의 존재감은 작지 않았다. 다만 기록에 제대로 남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저자는 “보이는 것만으로 세계와 역사를 확정짓는 건 폭력”이라며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감성과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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