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짙게 깔린 어두운 ‘무진’의 밤. 서울 소재 제약회사 상무 윤기준(신성일)은 무진중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윤기준은 서울에 있는 아내 때문에 하인숙에게 다가가기를 망설인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듯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공허하게 울린다. 윤기준이 명확한 약속 없이 도망치듯 무진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며 노래 ‘안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김수용 감독(93)이 1967년 연출한 영화 ‘안개’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김승옥 작가(81)가 1964년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다. 각색 역시 김 작가가 맡았다. 소설가로 활동하던 김 작가가 처음 했던 시나리오 작업이었지만 13만 명의 관객을 끌었다.
최근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을 계기로 ‘영화인 김승옥’이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안개’와 ‘헤어질 결심’ 모두 유부남이 우연히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안개’의 무진처럼 ‘헤어질 결심’은 안개가 가득한 바닷가 소도시 이포가 배경이다. 노래 ‘안개’는 ‘헤어질 결심’에 나온다.
이같은 상황 속에 10일 그의 각본집 ‘안개’ ‘도시로 간 처녀’(스타북스)가 출간됐다. 허리 수술을 받고 재택 치료 중인 김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각본집을 펴낸 이유가 뭔가. “올해는 단편소설 ‘생명연습’(1962)으로 문단에 나온 지 60년이 되는 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스타북스 대표가 그동안 출판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의미가 있겠다 싶어 수락했다.”
―‘영화인 김승옥’이 요즘 세대에겐 낯설다. “서울대 불문학과 재학 중인 1960년대 유럽을 강타한 영화 사조 ‘누벨바그’(새로운 물결)가 불었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 ‘안개’ 외에도 영화작업이 많다. 소설가 김동인(1925~1951)의 소설 ‘감자’를 각색,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1968년 발표했다. 같은 해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1934~2022)의 소설 ‘장군의 수염’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로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소설가로서 영화작업이 부담되지 않았나. “소설이나 영화나 내게 별 차이가 없다. 어떤 이는 영화가 ‘아픈 손가락’이 아니냐고 묻던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각색한 작품들 상당수가 문학을 원작으로 했다.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문학의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영화인의 길로 들어서고 싶은 젊은이가 내 각본을 보고 영감을 얻는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바탕으로 영화 ‘안개’ 각본을 썼다. “각색은 감독이 만들고자 하는 요구에 충실한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감독이 원하는 쪽으로 작업했다.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각자의 생명력을 갖고 독자나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을 계기로 영화 ‘안개’가 언급되는데. “영화 ‘안개’가 ‘헤어질 결심’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노래 ‘안개’에 관련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당시 작곡가 이봉조(1931~1987) 선생이 작곡한 곡을 전화로 색소폰 연주로 거듭 들려줬다. 곡을 들으면서 나는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열심히 작사했다. 그런데 발표된 노래를 들어 보니 제가 작사한 원문에 약간 손질을 했더라.”
―1981년 각본을 쓴 영화 ‘도시로 간 처녀’도 출간했다. “버스회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악한 부조리를 고쳐보려는 버스안내양의 분투를 그린 영화다. 상영 6일 만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운전기사와 버스안내양의 명예를 손상했다며 상영중지를 요청했다. 반발은 예상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제작사가 자진해서 상영을 중단했고 내용을 손봐 2개월 후에 다시 상영했다.”
―‘도시로 간 처녀’는 원작 없이 바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수시로 버스회사에 가서 분위기 파악도 하고 어떤 날은 종일 버스에 앉아 운전기사와 안내양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안내양과 대화하면서 실생활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도 집필에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각본집을 계속 펴낼 계획인가. “내가 집필한 각본 16편을 모두 출판하고 싶다. 내가 각본을 쓰고, 배우 윤여정(75)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충녀’(1972) 각본을 특히 펴내고 싶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