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 속 잠자는 고문헌 DB화… 한국史 공백 메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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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기록유산 DB 구축’ 1년
정부기관 첫 민간사료 전수 조사
청나라 파견일지 ‘연행일사’ 등 충청-전라-제주서 2만여건 발굴
“2026년까지 전국 곳곳 훑을 것”

충북 청주 고령신씨(高靈申氏) 가문의 장손인 신모 씨(61)의 자택엔 대대로 전해져온 고문헌들이 ‘살고 있었다.’ 수백 년 집안 서재 한 칸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나 더 둘 곳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고심이 깊어가던 와중에 올해 9월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에서 연락이 왔다. 종중(宗中)을 포함해 민간에서 보존해온 기록유산을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흔쾌히 조사에 응한 신 씨는 빛바랜 고문헌이 가득한 ‘비밀의 방’ 문을 활짝 열었다. 신 씨는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자료가 방대해 어떤 내용인지 일일이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진가를 알아줄 때가 오리라 믿었다”고 말했다. 10월 한 달간 고령신씨 가문의 고문헌을 전수 조사한 결과, 2359건에 이르는 사료가 빛을 보게 됐다.

문화재청과 함께 민간 기록유산 실태 조사에 나선 고문헌과콘텐츠연구소 연구원들이 7월 8일 충북 음성군 운곡서원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과 함께 민간 기록유산 실태 조사에 나선 고문헌과콘텐츠연구소 연구원들이 7월 8일 충북 음성군 운곡서원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처럼 민간에는 존재 유무도 확인되지 않은 채 전해져 내려온 고문헌들이 적지 않다. 문화재청이 올해부터 민간 기록유산의 실태를 조사하는 ‘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DB) 구축사업’을 실행한 이유다. 정부기관이 민간 사료 전수 조사에 나서 이를 일원화하는 건 처음이다.

문화재청이 고령신씨 가문의 고문헌에서 찾아낸 청나라 파견일지 ‘연행일사’의 일부.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이 고령신씨 가문의 고문헌에서 찾아낸 청나라 파견일지 ‘연행일사’의 일부. 문화재청 제공
기록유산 DB 구축사업은 벌써 적지 않은 성과를 얻고 있다. 고령신씨 고문헌 조사에서도 조선후기 문신 신좌모(1799∼1877)가 1855∼1856년 청나라에 서장관(書狀官·외교문서 기록관리)으로 파견됐을 때 작성한 ‘연행일사(燕行日史)’ 유일본이 처음 발견됐다. 조사에 참여한 김근태 고문헌과콘텐츠연구소 대표는 “청나라 문인들과 나눈 대화와 한시 등이 빼곡해 양국의 문화교류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왜 지금껏 민간 사료 파악에 적극 나서지 않았을까. 왕실이나 정부 기록유산에 비해 내밀한 사적 영역이라 대부분 등록조차 안 된 ‘비지정문화재’였기 때문이다. 그간 일부 지역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소규모 연구만 진행되곤 했다. 최근 학계에서는 생활문화상이 담긴 미시사(微視史)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전문위원은 “개인이 남긴 역사야말로 그간 거시적 시각에 치우친 한국사의 공백을 채워줄 사료라는 인식이 높아졌다”고 했다.

충북 제천에서 활동하는 의병연구가 양승운 씨가 수집해온 항일의병사료에서도 독립운동가 이범진 열사(1852∼1911)가 남긴 유일한 시고(詩稿·시의 초고)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쓰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자결한 이 열사는 관련 기록이 거의 전해진 게 없었다. 김근태 대표는 “양 씨의 사료에서 1896년 경북 안동에서 활약한 의병장 권세연(1836∼1899)의 격문도 찾았다”고 말했다.

‘남종화의 마지막 거장’이라 불리는 아산 조방원 화백(1926∼2014)이 수집한 고서 1만990건도 이번 조사에서 새로 발굴됐다. 특히 중국 송나라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 목판본 919장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아람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사무관은 “성리대전 목판본이 이처럼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건 처음”이라며 “국가지정문화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문헌 실태를 파악한 후 각 문헌을 촬영해 데이터베이스(DB)로 만든다. 문화재청 제공
고문헌 실태를 파악한 후 각 문헌을 촬영해 데이터베이스(DB)로 만든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충청과 전라, 제주에서 2만 건이 넘는 신규 고문헌 자료를 찾아냈다. 내년부터 조사 지역을 확대해 전국의 민간 기록유산을 세세하게 훑을 방침이다. 문화재청은 “2026년까지 기록유산 DB 구축사업을 하며 연구를 병행해 민간 기록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기록유산#데이터베이스#구축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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