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 언제나 상업적인 글을 썼다. 먹고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가벼운 글을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면 조금 허전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깊게 공감하는 주제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럴 때면 홀로 방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써 내려갔다.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자 김혜빈 씨(29)는 포부를 묻자 자신감 있게 답했다.
“7년 동안 웹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런데 주위에선 저를 ‘진짜 작가’로 인정하지 않더군요. 신춘문예를 계기로 웹소설 작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싶어요. 어떤 이야기를 쓰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작가라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동화, 시나리오, 문학평론, 영화평론까지 모두 9개 부문에서 김혜빈 공현진(36) 권승섭(21) 김미경(57) 임선영(29) 김서나경(본명 김나경·43) 장희재(30) 민가경(29) 윤성민 씨(39)가 당선됐다. 당선자들은 직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라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 덕에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영하 14도의 한파가 몰아쳐 몸은 꽁꽁 얼었지만 당선자들의 표정은 이른 봄이 찾아온 듯 해맑았다.
단편소설 당선자 공현진 씨에게 신춘문예는 닿을 듯 닿지 못했던 꿈이었다. 공 씨는 학사, 석사, 박사 모두 국문학을 전공하며 작품을 꾸준히 써 왔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가 본심까지 진출했지만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매일 고민했다. 올해 단편소설을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도 마음을 비웠지만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뤘다.
“‘신춘문예 장수생’이어서 불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습니다.”
시 당선자 권승섭 씨는 올해 최연소 당선자. 권 씨는 7세 때 하늘을 훨훨 날아가다 꽃에 앉은 배추흰나비를 그린 시를 썼다. 대학생인 그는 시뿐 아니라 소설, 동화, 희곡 등 다양한 작품을 쓰고 있다. 소감을 묻자 권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당선이 된 것 같아 기쁨보단 걱정과 불안이 앞섭니다. 제가 행복하게 시를 썼을 때 반응이 좋더라고요. 즐겁게 쓰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시조 당선자 김미경 씨는 올해 최고령 당선자다. 어릴 적부터 시인을 꿈꿨던 문학소녀였지만 결혼 후 아이를 키우느라 글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17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펜을 잡았다. 당선 전화를 받은 건 미국에 있는 아들의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던 때였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김 씨를 향해 아들이 “축하한다”고 나직이 말했다고 한다.
“자연과 사물에 귀가 열린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흔들리는 바람의 말도 귀담아듣겠습니다.”
각자 상황이 달랐던 만큼 준비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수년간 투고 끝에 당선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 도전에 당선된 이도 있다. 영화평론 당선자 윤성민 씨는 올해 처음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됐다. 윤 씨는 대학생 때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평론을 제대로 써본 적은 없다. 올해 신춘문예 공고문을 보고 동아일보에만 응모해 당선됐다. 중앙일보 기자인 윤 씨는 “기자 업무가 명확한 글쓰기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해 평론을 쓰겠다”고 했다.
희곡 당선자 임선영 씨는 대학생 때부터 10년 가까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번번이 낙선한 탓에 회사원으로 생업을 이어갔지만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임 씨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작가가 못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다”며 “신춘문예 당선은 이루지 못했던 꿈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라고 했다.
당선자들은 등단이라는 첫발을 뗐다. 이들에게 작가는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가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어 신춘문예에 응모한 동화 당선자 김서나경 씨는 “내 이야기가 세상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과 좋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며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두려움도 있지만 더 나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며 웃었다. 매일 8시간씩 카페에서 일하며 작품을 쓴다는 시나리오 당선자 장희재 씨는 “아직 남들만큼 이뤄놓은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다”며 “사람들을 한바탕 울리거나 위로를 주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문학평론 당선자 민가경 씨는 문학을 동경했지만 생계를 위해 6년 동안 항공교통관제사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퇴직 후 뒤늦게 꿈을 찾아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당선의 기쁨을 맛봤다. 배수의 진을 친 그의 도전은 시작일 뿐이다. 민 씨는 힘찬 목소리로 고백했다.
“신춘문예 당선은 꿈을 외면하고 살았던 제게 문학이 ‘꿈꿔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 같아요.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난 순간입니다. 문학이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평론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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