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은 일찍이 “새들은 깃들 곳 있음을 좋아하니,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한다오(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讀山海經’ 13수 중 첫 번째 수)라며 집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 당나라 시의 주제를 상세하게 분류한 것으로 유명한 책인 ‘당시유원(唐詩類苑)’에도 거처에 대한 항목이 유난히 많다(居處部). 지금은 물론 과거에도 집이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 후기 윤기(1741∼1826)는 집 없는 설움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시인은 무려 30여 년간 과거에 낙방했고, 50대에 뒤늦게 합격한 뒤에도 한양에서 셋방살이를 면치 못했다.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기도 했고(‘靡室’), 집 없이 떠도는 설움을 제비에 빗대기도 했다(‘客燕’). 이 시에선 작은 이익에도 악착같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프란시스 하’(2012년)에서도 주인공 프란시스가 미국 뉴욕에서 집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을 부각했다. 무용단 수습단원인 프란시스는 비싼 집세로 힘겨워한다. 무용단에서 밀려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가까운 친구와도 서먹해진다. 이는 시인이 신교(神交·마음이 통하는 사귐)가 불가능함을 한탄한 것과도 닮았다.
프란시스가 어쩔 수 없이 이사할 때마다 화면엔 새 집주소가 나온다. 반복되는 이사에 지쳐가던 그는 시인과 달리 결국 자신만의 거처를 마련한다. 프란시스는 안도감에 짐 정리도 안 된 어수선한 방에 앉아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공동주택 우편함에 자신의 이름을 쓴 종이를 끼워 넣지만 ‘할러데이’라는 성의 뒷부분이 가려져 ‘프란시스 하’까지만 보인다. 정주할 집이 생겼지만 삶은 여전히 미완이다.
과거 지식인들은 앞서 소개한 도연명의 ‘애오려(愛吾廬)’란 시구를 좋아해 집의 이름으로 삼기도 했다. ‘애오려’는 본래 내 집을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나를 사랑하는 집이란 의미도 될 수 있다. 시인과 비슷한 시기를 산 홍대용(1731∼1783)의 집 이름도 ‘애오려’였다. 김종후(1721∼1780)는 홍대용의 ‘애오려’에 대해 나를 진정 사랑하는 일은 곧 남을 사랑하는 일이며 남은 곧 커다란 나임을 알아야 한다고 풀이했다(‘愛吾廬記’). 내 집을 사랑하는 일도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함께 헤아리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나 재테크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애오려’의 의미처럼 집은 나와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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