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속 ‘토끼와 달’
인도 ‘회토사상’ 동아시아로 퍼져 삼국시대 고분-고구려 벽화에도 등장
새해 첫 묘일은 ‘장수 비는 날’, 명주실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아
“소퇴도 배를 갈라 간이 들었으면 좋으려니와 만일에 간이 없고 보면은 불쌍한 토명만 끊사오니 누굴 보고 달라 허며 어찌 다시 구허리까? 당장에 배를 따서 보옵소서!”
판소리 수궁가에서 토끼가 간을 빼먹으려는 용왕을 속이는 대목이다. ‘교활한 토끼는 굴이 셋’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토끼는 영리함의 상징이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을 맞아 전통문화 속 토끼를 알아봤다.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네 번째 동물인 토끼는 방향으로는 정동(正東)이고, 시간으로는 오전 5∼7시에 해당한다. 달로는 음력 2월을 지키는 방위신(方位神)이다. 토끼는 특히 노랫말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동요 ‘반달’)에서처럼 달에 사는 동물로 인식돼 왔다.
책 ‘운명을 읽는 코드 열두 동물’(2008년)에 따르면 달이 토끼를 품고 있다는 ‘회토(懷兎)사상’은 인도에서 시작해 불교 문화를 공유한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대 산스크리트어에서 토끼는 ‘뛰어오르는 동작’을 표현하는 단어와 같았는데, 이 단어가 달을 지칭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설화에서도 토끼가 달과 연결된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숲속에서 먹을 것을 찾자 수달은 물고기를 바쳤고, 원숭이는 과일을 바쳤다.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 토끼는 자신의 살을 구워 바치려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려 했다. 토끼에게 감명받은 스님은 토끼를 달에 보내 살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문화가 전래된 이후 축조된 삼국시대 고분에 달 속 계수나무 밑에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 모습이 나온다. 고구려 벽화의 동물화 속 토끼도 달의 상징으로 파악된다.
창덕궁 대조전 뒤뜰 굴뚝에는 토끼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경복궁 교태전 뒤뜰 석련지에도 두꺼비와 함께 토끼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달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여성의 소망을 토끼 장식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동물민속론’(2003년)에 따르면 새해 첫 묘일(卯日)인 상묘일(上卯日·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었다. 남녀 모두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면 명이 길어진다고 믿었다. 또 이날 베틀에 올라가 베를 짜야 장수한다고 전해졌다. 반면 토끼를 ‘방정맞고 경망한 짐승’으로 여기며 이날을 꺼리기도 했다. 경기 지역에서는 이날을 ‘톳날’이라 부르며, 과거 머슴이나 식모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전남 지역에서는 이날이 ‘방정맞은 날’이라고 하여 어부들이 출항하지 않았다.
옛이야기들은 토끼를 지혜로운 동물로 그렸다. ‘덫에 걸린 토끼’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토끼가 콩밭의 콩을 먹으려다 덫에 걸렸지만 왕파리 떼의 도움을 받아 시체 시늉을 해서 풀려난다. 천진기 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은 “토끼는 힘이 약하고 몸집이 작지만 꾀와 영리함을 지녀 강한 동물에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골탕을 먹이는 존재로 나타난다”며 “남을 해하지 않는 심성 때문에 평범한 서민이나 백성에도 비유된다”고 설명했다.
토끼는 탁월한 번식 능력을 지녀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토끼는 한 번에 열 마리 넘는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은 약 30일에 불과하고 자궁이 2개여서 임신 중에 다른 자궁에 중복 임신이 되기도 한다. 토끼 한 쌍은 이론적으로 1년 뒤 수백 마리의 거대 집단으로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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