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평생을 걸어온 선구자의 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21일 03시 00분


◇길을 묻다/이길여 지음·인터뷰 김충식/512쪽·2만7000원·샘터

무당이 의사 노릇을 하던 시절이었다. “귀신이 붙어서 아프다”는 미신이 팽배했던 어린 시절, 장티푸스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만약 동네에 전문의가 있었다면 친구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여성 의사로서 국내 최초로 의료법인 길병원을 설립한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의사를 꿈꾸게 된 이유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김충식 가천대 특임부총장이 2년간 이 총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분단을 모두 겪은 이 총장의 생애가 촘촘하게 담겼다.

여자라는 이유로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던 이 총장은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6·25전쟁 때도 방공호에 들어가 밤낮없이 공부했다. 1964년 미국으로 유학도 떠났다. “미국에 남아 달라”는 미국 퀸스종합병원의 부탁은 물론이고 당시 연애하던 한국인 유학생의 청혼을 모두 뒤로한 채 1968년 고국으로 향했다. 가난한 조국의 환자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1978년 국내 여성 의사 최초로 길병원이라는 의료법인을 설립한 그는 무료 검진을 실시했다. 1980년 인천 길병원에 무료 자궁암 조기 진단센터를 설치했다. 검진 대상도 저소득층 여성뿐 아니라 30세 이상 모든 여성을 아울렀다.

그는 인천에 이어 경기 양평군과 강원 철원군에 길병원을 세운 이유에 대해 “그곳 주민들의 애타는 청원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두 지역은 병원 운영에 적자가 날까봐 정부도 엄두를 못 내던 곳이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여력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늘 사람을 생각했다는 그의 철학 때문일까. “나는 공익 경영이니 윤리 경영이니 하는 전문적인 용어는 모른다. 다만 사랑으로 경영했을 뿐”이라는 답변에서 당당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길여 총장#생애#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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