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에 가볼만한 ‘토끼산행’
월악산에 뜨는 달속의 옥토끼
북한산 능선에 선 쌍토끼바위
토끼해 이벤트 즐기고 싶다면
《계묘년(癸卯年) 설 연휴를 앞두고 토끼의 하얀 털처럼 보송보송한 눈이 덮인 설산(雪山)을 찾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토끼는 1000년을 사는데 500년이 되면 털이 희게 변한다고 한다”라며 흰토끼를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보았다. 용궁에 잡혀가도, 호랑이에게 먹힐 위기에도 지혜로 탈출해내는 토끼는 지혜와 성장, 부부애와 화목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남녀노소 모두 다 친근하게 여기는 토끼의 미덕을 생각하며 겨울산에 올라보자.》
●월악산의 달토끼, 옥토끼
서울에 밤새도록 비가 내렸던 지난 주말. 충북 제천에 있는 월악산(月岳山)에 올랐다. 소백산을 지나 속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월악산의 험준한 산세에서 겨울 산행의 백미인 눈꽃과 상고대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창교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20여 분 만에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나뭇가지마다 보송보송한 솜털같은 눈이 쌓이고, 기암절벽에 뿌리내린 소나무의 솔잎에도 얼음이 얼어붙었다. 낮게 깔린 구름이 뿌연 안개처럼 골짜기를 가득 메우니 한 폭의 수묵화같은 절경이 펼쳐진다. 아이젠을 신고 스틱으로 균형 잡으며 조심조심 정상으로 올라간다. 산 아랫부분에서는 눈꽃이 피었는데, 송계삼거리를 지나 높이 올라갈수록 찬 바람이 불면서 서리가 얼어붙은 상고대가 피어난다.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여. 드디어 월악산 정상인 영봉(靈峰·해발 1097m)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산 중에 주봉의 이름이 영봉인 것은 백두산과 월악산 둘뿐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聖山) 또는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산이고, 월악산도 신라시대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창교 입구에 있는 월악산신제의 유래 간판에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당시 월악산으로 사람들이 피란해 몽골군이 쫓아왔는데, 갑자기 날씨가 사나워져 몽골군이 월악산의 산신령이 노했다고 여기고 추격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라고 적혀 있다.
월악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영봉 위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신라시대 월형산(月兄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월악산 달맞이 산행도 일품이다. 월악산 영봉에 걸리는 커다랗고 둥근 달은 자연스럽게 옥토끼(달에 산다는 토끼)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조선시대 한시, 민화, 구비문학에 이르기까지 옛사람들은 달에 토끼가 살고 있으며, 토끼를 달의 정령으로 여겼다. 예로부터 토끼는 선한 품성과 평화로움 때문에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생각했다. 달은 사람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세상이었기에 달에 사는 토끼 전설이 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토끼는 달에서 절구로 떡방아를 찧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원래는 약초를 찧어 신선들을 위한 장생불사 약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달토끼의 전설은 만병통치의 약 ‘토끼의 간’으로 이어져 ‘별주부전’ ‘수궁가’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영봉은 달이 걸리는 멋진 암벽이지만, 낮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조망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충주호의 비경과 속리산, 대야산, 조령산, 주흘산의 산세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봉에 올랐으나 짙은 안개 구름에 싸여 충주호를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다음 날 영봉에 오른 지인이 맑게 개인 월악산 사진을 보내주었다. 상고대가 피어 있는 순백색의 산세와 충주호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이 어우러져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날씨가 좋은 날, 충주호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보덕암에서 하봉, 중봉, 영봉을 넘어가는 코스로 월악산을 다시 한 번 찾으리라.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 망월사(望月寺)에도 달과 토끼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망월사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다. 원래는 신라시대 수도인 경주 월성(月城)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달토끼의 전설은 우리의 산하 곳곳에 남아 있는 정겹고 평화로운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북한산 의상능선 ‘쌍토끼 바위’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전국에 토끼 관련 지명은 158개다. ‘토끼골’ ‘토끼섬’ ‘토산’ ‘토끼봉’ ‘묘봉’ 같은 이름이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토끼 모양은 흔치 않은데, 새해 산행 도중 서울 북한산 의상능선에서 영락없이 토끼를 닮은 바위를 만났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의상봉 방향 능선의 가파른 암릉을 네 발로 기다시피 하며 올라간 지 1시간여. 갑자기 시야가 탁트이는 절벽 위에 용의 뿔을 단 개구리 얼굴같은 바위가 나타났다.
뒤로 돌아가니 쫑긋 선 두 개의 귀를 가진 토끼 두 마리가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살짝 감은 둥그런 눈과 찢어진 입술, 토실토실한 엉덩이까지 영락없는 토끼다.
전통적으로 토끼를 그릴 때는 한 마리만 그리지 않고 두 마리를 그린다. 달에서 계수나무 아래 방아를 찧는 쌍토끼를 비롯해 민화 ‘화조영모도’에서도 모란꽃 아래 두 마리의 토끼를 그려 넣었다. 부부애와 화목함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의상봉 능선에서 쌍토끼 바위에 손을 대고 새해 소원을 빌어본다. 우리 부부에게도 사랑이 넘쳐나고, 가족도 늘 건강하고 화목하기를.
의상봉 쌍토끼 바위의 넉넉한 엉덩이는 긴 뒷다리를 감추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토끼의 뒷다리는 앞다리보다 2∼3배나 길다. 그 덕분에 토끼는 오르막과 평지에서 최대 시속 80km까지 껑충껑충 뛸 수 있다. 그러나 내려갈 때는 속도를 내지 못해 사냥꾼들은 아랫방향으로 토끼몰이를 한다. 높이 오르는 습성 탓에 토끼는 승진과 출세, 성장의 상징이기도 하다. 토끼님, 새해에는 코스피 주가도 오를 때는 팍팍 오르고, 내려갈 때는 조금씩 내려가게 해주시길.
경계심이 많은 토끼는 지혜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은 조선시대에는 지조가 없는 선비를 비아냥대는 말로도 쓰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경구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 놓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판소리 ‘수궁가’에서 토끼는 자라의 속임수에 용왕한테 끌려가 간을 빼앗길 위기에 몰린 힘없는 서민들의 상징이다. 권력자(용왕)와 그 하수인(자라)의 농간에 멍하니 있다 보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
토끼는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나보다 뜨거운 돌덩이가 더 맛있다’고 속이고, 용궁에서는 ‘간을 빼놓고 왔다’고 꾀를 내 도망가는 ‘탈토지세(脫兎之勢·우리를 민첩하게 빠져나가는 토끼의 기세)’의 정수를 보여준다. 새해에는 모두들 토끼처럼 샘솟는 지혜로 위기를 헤쳐나가고 퀀텀점프로 높이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월악산 산행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친구가 퀴즈를 냈다. “토끼가 동물의 제왕이 됐다고 한다. 어떻게 됐을까?” 글쎄. 작고 귀여운 초식동물 토끼가 어떻게 제왕이 됐을까? 답은 ‘깡과 총으로’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서운 토끼다.
●토끼해 설 연휴 가볼 만한 곳
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토끼해 특별전 ‘새해, 토끼 왔네’가 열린다. 토끼 생태에 얽힌 다양한 민속이야기를 볼 수 있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빛초롱 축제’에서는 빨간 복주머니를 든 대형 토끼가 야경 사진 명소로 인기다. 서울 월드컵공원과 목포 유달산, 대구 앞산 전망대에 설치된 달토끼 인형도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용인 에버랜드에서는 초대형 토끼 인형 ‘래빅’과 함께하는 설날 이벤트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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