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4년 첫 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정규 앨범 발매는 6년 만이지만, 영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년), ‘남한산성’(2017년)등 여러 영화 음악 작업을 이어왔다. 그는 올해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새 영화 ‘괴물’의 음악을 맡는다.
숨이 들고 나간다. 그 사이로 피아노 선율이 울린다.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일본의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71)가 17일 내놓은 6년 만의 오리지널 앨범 ‘12’는 투병생활 속에서 일기 쓰듯 제작한 음악 스케치다. 피아노와 전자음, 현장음이 어우러져 명상적인 시공간을 창조해낸다. 사카모토는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 일부러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나의 지금의 소리”라고 했다. 그는 2014년 인두암 진단을 받았으며, 2021년 1월에는 다시 직장암 투병 사실을 고백했다. 이번 음반은 2021년 이후 만들어진 곡들로, 제작된 날짜를 각 곡의 제목으로 삼았다.
사카모토 류이치 ‘12’ 음반 커버.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이우환이 이 음반을 위해 제작한 드로잉을 사용했다. 이 화백은 사카모토와 친분이 있다. 미국 유명 음악 평론지 ‘피치포크’는 ‘12’에 대해 “이전 작품보다 더 섬세하게 절제된 ‘조용한 우아함’을 택했다”면서 “이렇게 절제된 앨범이 많은 것을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씨앤엘뮤직 제공음반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편안함이다. 피아노 선율 사이에 그의 숨소리와 옷깃에 무언가 스치는 듯한 소리, 지글거리는 듯한 노이즈 등이 섞였다. 어떤 순간은 ASMR(자율감각쾌락반응)을 듣는 듯 하다. 박창학 작사가는 “소리 자체와 내면의 의식세계에 보다 더 깊이 침잠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며 “대중음악 방법론으로서 결코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을 꾸준히 따라온 팬들에게는 생소하지 않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음악이 획득한 독보적 위상”이라고 말했다.
얼핏 단순한 곡인 듯하지만 마니아틱한 풍미와 디테일이 가득하다. 이대화 음악평론가는 “따뜻하지만 어딘가 어둡고 슬픈, 혹한 겨울 속 산장 같은 분위기가 매력적이기도 처연하기도 하다”고 했다. 이어 “이런 장르의 매력과 어려움은 사운드의 디테일에 있다. 텅 빈 듯하지만 포근하게 꽉 찬 소리, 수평선을 보는 듯한 공간감 등 세계적인 거장답게 이런 디테일을 멋지게 살렸다”고 했다.
전작에 비해 두드러지는 것은 멜로디의 부재다. 피아노 선율은 예측되지 않고 불규칙적이다. 황선업 음악평론가는 “전작 ‘Async’(2017년)는 멜로디 맥락이 익숙하고 뚜렷한 곡들이 있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음반은 ‘음악을 듣는다’는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같은 ‘일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며 “그렇기에 이 작품은 ‘연주가 어땠느냐’ ‘완성도가 어땠느냐’와 같은 흔히 쓰는 기준은 의미도 없고 통용되기 어렵다. 그저 사카모토가 걸어왔던 길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에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12’는 사카모토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황 평론가는 “이 시점에서 이번 신보는 의도하지 않은 소리들의 원초적인 힘에 주목해온 그의 이상향을 가장 자유롭게 구현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며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고, 만지지 않는 소리가 듣는 이에게 가장 큰 자유를 부여하며, 그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작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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