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 글을 써야 해서 그에게는 서재가 필요했다. 내가 그의 서재를 치외법권 지대처럼 일상 세계와 격리시키려고 기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건국대 명예교수)이 다음달 26일 남편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1주기를 앞두고 최근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강 관장의 표현대로 한 가정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고인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 서재에서 16일 강 관장을 만났다. 그는 “1년 가까이 이 선생 서재의 디지털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았다”며 “올 가을쯤엔 (이 전 장관의 바람대로)서재를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의 서재는 그가 생전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6400권이 빼곡히 꽂힌 책장, 7대의 컴퓨터가 놓여져 있는 널따란 책상, 마지막까지 그의 삶을 기록해준 카메라까지. 서울대 국문과 동기로 만나 해로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 부부의 숙원은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온전한 서재를 갖는 것이었다. 평론을 쓰면서 여러 대학의 강의를 나가야 했던 두 사람에게 서재는 창작의 자궁이자, 세 자녀를 길러낼 수 있게 해준 생업의 현장이다.
생전 130여 권의 책을 쓴 ‘시대의 지성’ 이 전 장관과 64년을 함께한 삶은 어땠을까. 강 관장은 웃으면서 “대단히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다”면서도 “다시 살라면 못 살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혼 생활은 학교거든요.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부모가 되면 또 얼마나 사람이 돼요? 아이들이 부모를 많이 가르치잖아요. (원고 교정 등) 이 선생 심부름한 것도 후회 안하고, 그럴만한 분이었으니까. 근데 그러면서 내 일을 하려니까 힘들었죠. (이 선생은) 완벽주의자라 누굴 칭찬하는 법이 없었어요. 자기가 한 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강 관장은 책에서 남편 이야기하길 꺼려 왔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구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의 주택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부부가 안정된 보금자리를 마련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이 전 장관과의 일화나 가족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선생 이야기가 나오니까 본인에게 모니터링을 시켰죠. 사후에 내기로 합의를 봤고요. 읽고는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원래는 서로의 글을 읽거나 얘기하지 않아요. 집에만 오면 애 셋이 달려들어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잠들면 이 선생은 또 작업을 하셔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리얼리즘, 이어령 씨는 수사학·기호학 전공이니까 영역도 다르죠.” 그렇게 ‘크로스체크’까지 마쳤는데도 2020년 마무리된 이 책은 발간까지 3년이 걸렸다. 강 관장은 “이 선생이 (투병으로 인해) 책을 못내는 기간이 오니 다 쓴 책도 차마 내질 못했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의 투병 사실은 2019년 공개됐지만, 대장암 발병은 2015년부터였다. “이 양반이 병이 나니까 그때부터 쓸게 많다고 새벽 2시까지 서재에서 매일 글을 썼어요. 빨리 빨리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가 2시간에 한 번씩 올라와 상태를 살폈죠.” 이 전 장관이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 대신 집필을 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부부가 각자 써낸 책이 이 전 장관 사후 발간된 첫 유작 ‘한국인 이야기’와 강 장관의 이번 책 ‘글로 지은 집’이다.
결혼 후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데 집을 ‘연결고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집이 제일 중요하죠. 인간과 정착공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거예요. 아이들의 탄생, 이어령 씨와 나의 사회생활 진척도, 평론적 글쓰기, 서재의 함수관계 등 모든 게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피란민이던 강 관장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컸던 이 전 장관에게 있어 결혼 4년 만의 첫 내 집 마련은 “‘간장 종지만한 자유’(박완서 소설 ‘조그만 체험기’에서 인용)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해방시켜준” 적지 않은 의미였다.
이후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1974년 산골짜기 외딴섬이던 평창동에 지은 집은 부부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됐다. “바위산에 백설이 쌓여 천지가 거룩한 신선계” 같았던 평창동의 자연을 품은 집은 자녀들의 출가 후 2008년 이어령의 ‘영’ 강인숙의 ‘인’을 딴 문학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이어령)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강 관장은 허덕허덕 바빴다고 했다. “내 작업이 이 사람(이어령)을 해쳐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당시엔 인터넷이 없으니 남편이나 저나 평론을 쓰려면 큰 방에 책을 줄 세워 놓고 뽑아 쓰는 방식으로 ‘푸트노트’(주석) 다는 작업을 했는데, 저만 유독 남편이나 애들이 오면 하던 일을 숨기느라 급급했죠. 제가 일하는 걸 보면 가족들이 부담을 느낄까봐서요.”
늘 그에게 1순위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강 관장은 어쩌다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날엔 ‘자식도 없고, 돈도 없는 외로운 노인의 고독’을 떠올린다고 했다. “혼자 살고 싶은 그들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고 싶어요. 자유로우려면 외로운 건 참아야죠. 요즘은 익숙해져 괜찮아요. 1년의 학습기간이 있었으니까요.”
강 관장은 평창동 집에서 생을 마감한 이 전 장관과 같은 마지막 바람을 적으며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