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전후(戰後) 세계 금융질서를 세우기 위한 회의가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브레튼 우즈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달러가 기축통화(국제 간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 화폐)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와 안보 체제가 구축됐다.
미국은 연합국 사이의 갈등을 막았을 뿐 아니라 세계 화물운송의 안전을 자국 내 상거래처럼 보호했다. 이 덕에 어느 대륙에 있는 어느 나라든 세계 각지의 대양에 접근이 가능해졌다. 장거리 해상운송의 안전성이 담보되자 운송비는 저렴해졌고, 이는 세계의 분업화를 촉진했다. 군사 경쟁을 벌이던 제국들은 경제적인 상호 협력 관계가 됐고, 새로운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경제 성장과 안정을 가져왔다. 이른바 ‘75년 황금시대’다.
하지만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설계한 이같은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안보전략 싱크탱크 ‘스트랫포’의 분석 담당 부사장을 지낸 저자인 피터 자이한도 그 중 하나다. 지정학과 인구통계학에 기반해 국가의 부상과 몰락을 예측해온 지정학 전략가인 그는 전작인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2017년),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2018년),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2021년) 등에서 “미국이 구축해온 세계질서를 직접 허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최근 펴낸 네 번째 저서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김앤김북스)에서는 미국이라는 우산이 사라진 세계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구체적으로 예측했다. 또 인구 감소 위기와 맞물려 붕괴의 최전선에 놓일 나라들을 평가했다.
미국의 역할이 사라지면 각국은 자국이 포함된 공급사슬과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이같은 세계에서 가장 불리한 지역으로 저자는 동아시아를 지목한다. 손해가 가장 큰 건 중국이다. 에너지에 대한 접근과 원자재 수입 등이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의 인구 고령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무역 해상로의 안전을 미국에 의존하면서 제조업 공급사슬의 수혜를 봐 왔던 한국과 대만도 타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의 경우 출산율 하락이 일본보다 20년 늦게 시작됐지만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문제가 더욱 크다.
심지어 저자는 ‘기근의 시대’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농업에 필요한 연료, 비료 등 모든 공급 체계를 갖춘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뿐이다.
미국 주도 안보 체제의 와해와 맞물려 인구 감소도 인류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다. 2020년대 세계적으로 근로 연령층이 대거 은퇴하지만 이들을 대신할 청년층은 턱없이 적다. 이같은 인구 구조의 붕괴는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저자는 “브레튼 우즈 협정이 가속화한 전 세계의 도시화, 문명화가 출산율을 저하시켰기 때문”이라며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이 인구구조 붕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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