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들은 수토(搜討) 여행을 즐겼다. 영남 사림파의 으뜸 인물로 평가받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년)은 자신이 남긴 글에서 선조의 얼이 담긴 역사 및 문화 유적지를 찾아 살피는 행위를 ‘수토’라고 규정했다.
수토는 원래 ‘샅샅이 수색하여(搜) 토벌하는(討)’ 의미를 가진 공격적 단어인데, 감추어진 참(진리)을 치열하게 파헤쳐내는 학문적 행위를 뜻했다. 그러다가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국토를 탐구하고 즐기거나, 풍토가 달라 벌어지는 세상의 변화 등을 관찰하는 행위로 확장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우리 땅을 넘보는 적들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행위도 본격적으로 ‘수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아예 ‘수토사(搜討使)’라는 국가 공인 관직도 생겨났다. ‘수토(守土)’의 성격까지 띤 수토(搜討)는 자연히 땅의 기운을 다루는 풍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수토 코스 중 하나가 한양도성을 한바퀴 돌아보는 순성(巡城)놀이였다. 순성은 원래 한양도성 성벽을 점검하며 순행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점차 민간의 풍류로 정착됐다. 조선 정조 때 실학자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멋 있는 놀이”로 순성놀이(巡城之遊)를 소개했다. 순성놀이는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 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지만,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도 많다고 부연 설명도 했다.
실제로 ‘독서하는 마라토너의 여행과 자전거 타기’ 저자인 박종필씨가 지난해 10월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 돌기에 도전한 바 있다. 아침 8시30분에서 시작한 순성 순례는 저녁 6시50분에 끝나, 10시간 20분 정도 걸렸다고 자신의 블로그에 밝혔다.
● 하루만에 성 한바퀴 돌아야 소원 성취
순성놀이는 구복적 행위로도 ‘발전’했다. 이와 과련해 대일항쟁기인 1916년에 ‘매일신보’가 순성장거(巡城壯擧)라는 이름으로 순성놀이 행사(1916년 5월14일 시행)를 소개한 기사가 흥미롭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옛날 과거를 행했던 때에는 당시의 고등문관(高等文官;일제가 시행한 고급관료제) 후보자가 순성을 했다”면서 친일파 관료인 백작 이완용, 자작 박제순 및 임선준 등이 청년 시절 순성놀이를 했다고 전했다. 순성을 하고 나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단 순성놀이 성공에는 조건이 있었다. 순성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꼭 하루만에 마치지 않으면 효험이 없다는 것이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성을 도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반드시 서대문이나 동대문에서 출발해야 했다. 서대문에서 시작하면 성문을 한번 돈 다음 곧장 직선거리로 3km 떨어진 동대문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순성에 나서고, 반대로 동대문에서 시작하면 마찬가지로 성문을 돈 다음 서대문으로 가서 순성을 하는 식이다.
이는 경복궁을 둘러싼 한양도성을 입 구(口) 자 모양으로 보고, 그 가운데를 사람이 직선으로 걸어감으로써 ‘중(中)’자를 성립시킨다는 의미를 띤다. 한자어 중은 ‘적중’ 혹은 ‘관통’의 의미가 있어서, 과거 시험에 길한 점괘와도 같다. 이게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응시생들이 너도나도 순성 놀이에 가담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서대문(돈의문)이 대일항쟁기때 일제의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없어져 버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성놀이는 관직에 오르려는 사람들의 소원만 들어주는 게 아니다. 서울 종로의 상인들도 복을 받기 위해 순성놀이에 나섰다. 주로 봄과 여름철에 상인들은 남 몰래 성벽을 한바퀴 돌면서 상점의 번영과 운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성벽을 한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효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순성놀이에 등장하는 구복적 요소는 풍수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 동대문과 서대문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사람이 개입함으로써 ‘중中’을 완성시킨다는 사고나, 한양을 상징하는 도성을 돌아봄으로써 한양 땅의 좋은 기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됨)’의 원리를 응용한 풍수관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양도성 곳곳의 길목에는 명당 길지가 포진돼 있다. 대표적으로 창의문과 옛 성터인 대한상공회의소를 살펴보자.
먼저 한양도성 서북쪽 관문인 창의문(자하문, 장의문)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천기(天氣)가 왕성한 곳이다. 조선 초기의 지관 문맹검은 창의문을 하늘의 천주성(天柱星·하늘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별자리) 기운이 깃든 곳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니 평소에 닫고 보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또 남대문에서 소의문 터로 이어지는 성벽재현 구간에 자리잡은 대한상공회의소는 보기 드문 지기(地氣) 명당 터다. 지기는 풍요와 재물의 기운으로 본다. 바로 이 일대는 근대식 백동전을 찍어내던 주전소(鑄錢所)기 있던 곳이기도 해서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 명소중 하나로 꼽힌다.
이로 보면 조선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설계한 전문가들은 땅의 지형 및 기운을 읽어가면서 성문과 성벽을 건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 도성을 돌면 이런 곳에서 명당 기운을 흠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풍수는 집터나 무덤터를 고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광의적으로 자연에서 땅의 기운을 즐기는 문화적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에 활약한 산수화가인 종병(宗炳·375~443년)은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 “눈이 감응한 바를 마음으로 깨달아 구현해놓은 것이 산수화”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방안에 걸린 산수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 상태의 명산 기운을 똑같이 누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운생동(氣運生動)을 중시하는 산수화의 거장이 남긴 말이니 허투루 넘길 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양도성을 직접 걷다 보면 한양 기운을 온전히 누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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