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운 받기좋은 서산
산과 바다의 기운이 만나는 간월암
바위산의 氣 충만한 팔봉산
가지 아홉 소나무와 12억년 된 규암
《계묘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입춘(2월 4일)맞이 행사로 충남 서산을 찾았다. 바다 섬과 육지 산, 그리고 갯벌의 좋은 기운을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서산 남쪽의 간월도 간월암은 극강(極强)의 기운이 뭉친 터로 유명하다. 중심부인 팔봉산 정상에서는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에서 에너지를 받을 수 있고, 북쪽의 갯벌지대 웅도에서는 신령스러운 반송이 기다리고 있다. 추운 겨울철에 미각을 유혹하는 서산 전통의 맛집들은 여행의 덤이다.》
●산과 바다 정기에 취하는 간월암
서해의 작은 바위섬에 산신(山神)이 살고 있는 곳이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육지가 됐다가 다시 차면 두둥실 물 위로 떠오르는 서산 천수만의 간월도 간월암이다. 보통 바닷가 절이나 암자에서는 ‘바다의 신’인 용왕을 모시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면적이 3000㎡(약 900평)도 채 안 되는 손바닥만 한 섬에서 산신을 모신다는 건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육지의 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은 있다. 간월도가 지형적으로 육지 쪽 산에 뿌리를 둔 곳이기 때문이다. 간월도의 ‘육지 족보’는 대강 이렇다. 간월도는 1980년대 초반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서산 간척 사업을 하기 전만 해도 천수만 한가운데 섬이었지만, 바다 밑 지형은 북쪽의 부석사(서산)가 있는 도비산과 이어지고 있었다. 도비산은 다시 더 북쪽으로 서산의 진산(鎭山)인 부춘산으로 이어지고, 이곳에서 또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듯이 나아가 동쪽의 충남 예산 가야산까지 맥이 닿아졌다. 즉, 풍수적으로 간월도의 간월암은 가야산 정기가 멀리 휘돌아와 압축적으로 맺힌 곳으로 풀이된다.
그 정기가 뭉친 간월암 산신각에는 호랑이 등에 앉은 인자한 모습의 산신 탱화가 있다. 관람객들의 동선을 보면 간월암 법당과 바로 옆에 있는 산신각에서 참배한 뒤, 맞은편 해신각(용왕각)에서 용왕에게 인사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가야산 기운과 천수만의 바다 기운을 취하기에 좋은 곳이다.
명당 길지에는 고승(高僧)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곳 암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에 의해 창건됐다. 무학대사는 이곳에서 떠오른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看月庵(간월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간월암에서 일몰 풍경과 바다 위로 어른거리는 달빛 여행을 즐기다 보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다. 이 지역 출신인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보낸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올해는 2월 5일) 만조 시에 부석면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벌어진다.
간월암은 한때 폐사됐다가 만공 스님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대일 항쟁기 가야산 자락에서 득도한 만공 스님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이곳에서 천일기도(1942년 8월∼1945년 8월)를 했다. 기도를 마친 사흘 후 조국이 독립을 맞이하는 경사가 생김으로써 간월암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팔봉산 바위에서 활력 얻기
서산 팔봉산(362m)은 8개의 봉우리가 바둑돌처럼 줄지어 서서 갯벌과 바다를 굽어보는 산이다. 원래는 9개 봉우리인데 가장 작은 봉우리를 제외하고 보통 8개만 친다. 이 때문에 제외된 한 봉우리가 매년 12월 말이면 홀로 빠졌다고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팔봉산은 철계단과 로프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험한 산이지만, 8개 봉우리 모두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암산(巖山)을 즐기는 맛을 준다. 산행은 팔봉면 양길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제1봉을 지나 제8봉을 끝으로 어송리로 내려오는 코스인데, 의무적으로 모든 봉우리를 다 둘러보지 않아도 좋다. 제1봉에서 제3봉까지의 코스가 가장 풍광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제1봉은 감투봉 또는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벼슬아치가 쓰는 감투 모양 또는 곡식을 쌓아둔 노적(露積)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보며 소원을 빌면 부귀영화를 얻게 된다는 전설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있다. 실제로 풍수에서는 노적봉이 재물 기운을 불러 모은다고 본다.
제1봉에서 제2봉 가는 길에서는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를 보며 고향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는 거북바위, 용왕이 파견한 우럭이 팔봉산 경치에 반해 그만 바위가 돼버렸다는 우럭바위, 암수 코끼리 2마리처럼 생긴 코끼리부부바위 등 전설과 생김새가 그럴싸한 암반들이 즐비하게 펼쳐진다.
제2봉은 ‘어깨봉’으로 불린다. 힘센 용사의 어깨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용맹과 건강을 상징한다. “어깨봉을 오르며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면 기(氣)가 몸에 충만해 활기가 넘치고 새 힘을 얻어 삶이 새롭게 변화된다”는 흥미로운 안내판도 눈에 띈다.
제2봉에서 제3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험한 코스이지만, 정상의 절경은 충분히 고생을 보상해 준다. 삼면이 석벽으로 이뤄진 정상에서는 서해안 지역의 가로림만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곳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천제단도 남아 있다. 큰 바위가 자연스럽게 단을 이루고 있는 형태다. 서산읍지인 ‘호산록’에 의하면 예부터 가뭄이 들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뭄이 심할 때 군수나 지역 대표들이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영험한 곳으로 소문났다.
제3봉에서 양길리 주차장으로 향하는 하산로를 따라 내려올 수도 있고(약 1시간 거리), 능선길을 따라 제8봉까지 갈 수도 있다(약 3시간 거리).
●신비의 웅도 반송
서산 북쪽에는 곰을 닮은 섬 ‘웅도’가 있다. 대산읍 웅도리에 있는 섬으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곰이 웅크리고 앉은 형태다. 웅도(1.58㎢)는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가로림만 내에 있는 여러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다.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육지와 연결된 마을이 되기도, 섬마을이 되기도 한다.
뭍에서 불과 700m 떨어진 웅도는 유두교라는 다리가 섬의 관문 역할을 한다. ‘하루 두 번 물에 잠기는 다리’로 유명한 유두교는 ‘웅도 잠수교’라는 이름으로 인증샷 명소로 떠올랐다. 유두교 위로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기 시작하는 밀물 때 다리 위에서 찍는 사진이 하이라이트다. 바닷물이 차고 빠지는 시간은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이곳을 찾기 전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를 통해 물길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아쉽게도 유두교는 2025년이면 사라진다고 한다. 이 다리가 바닷물의 흐름을 방해해 갯벌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평가 때문이다.
웅도 마을회관을 지나 섬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수령 400년이 넘은 ‘웅도 반송’을 만나게 된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 덕에 일부러 이곳을 찾는 이가 적잖다. 밑동은 하나지만 나뭇가지가 아홉 줄기로 갈라진 신비한 모습이다. 반송이 자리 잡은 터의 기운이 범상치 않아 나무 또한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외에도 조그만 섬치고 볼거리도 꽤 있다. 선캄브리아 시대의 규암층은 12억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지질학 교과서로 웅도 선착장에서 북서쪽으로 30m 떨어진 지점에서 관찰할 수 있다. 웅도에서 또 다른 섬인 조도를 연결하는 갯벌길은 모세의 기적이 열리는 바닷길이다. 현재 조도에는 단 1명만 살고 있다고 한다.
서산에서는 음식 맛의 기운도 느껴볼 일이다. 간월도와 웅도에서 생산되는 자연산 굴과 젓갈로 만든 서산어리굴젓, 구수하고 개운한 맛이 특징인 게국지, 뽀얀 국물과 꾸덕꾸덕 마른 우럭이 어우러져 감칠맛을 내는 우럭젓국, 낙지를 박속과 함께 탕으로 조리해 먹는 밀국낙지탕이 서산의 대표적 전통음식이다.
이와 함께 서산 제1경으로 꼽히는 해미읍성 바로 인근에 있는 씨앗호떡 집은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소개된 뒤 지금도 긴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는 별미집이 됐다. 또 해미읍성 출입구인 진남문 근처 탱자성 사랑방 카페는 2014년 해미읍성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먹은 키스링 마늘빵으로 유명하다. 교황의 간식 식탁에 오른 이 빵은 서산의 6쪽 마늘로 만들었다고 한다. ‘서산 스토리가 있는 맛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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