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사랑 앞에서 베토벤은 악성(樂聖)이기 전에 누구보다 겸손한 인간이었다”는 배우 카이(본명 정기열·42)를 27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만났다. 말 한마디마다 가장 알맞은 단어를 고르느라 신중한 모습에선 맡은 배역에 대한 고민의 무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음악을 얘기할 때의 눈동자는 극중 사랑하는 여인에게 빠져 ‘미쳤다’고 말하는 베토벤처럼 환히 빛났다.
12일 EMK 창작뮤지컬 ‘베토벤’이 전 세계 초연으로 개막했다. 뮤지컬 ‘엘리자벳’ 등에서 합을 맞춘 작사·작곡가 콤비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참여해 장장 7년 끝에 완성됐다. 굴곡진 삶을 산 상처받은 음악가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 안토니 브렌타노를 만난 후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교향곡 5번(운명)’,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 등 베토벤 작품의 짧고 강렬한 모티브를 뮤지컬 넘버로 탄생시킨 것이 특징이다.
뮤지컬만 17번째 작품인 정상급 배우지만 카이는 이번 작품에서 스스로에게 더 가혹해졌다. “배역을 제안 받고 정말 기뻤지만 베토벤이 음악사에서 갖는 의미를 잘 알기에 중압감도 컸습니다. 특히 극중 고통 받는 영혼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전 배역들보다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리허설 영상을 본 그는 “내 고민이 이것밖에 안 됐나 하는 실망감에 고통스럽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고심 끝에 그는 ‘완벽한 음악을 가만히 바라보는 심정으로’ 노래하기로 했다. 통상 뮤지컬 배우들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곡을 조금씩 변형하는 것과 달리 베토벤이 원곡 악보에 써둔 음정과 박자를 그대로 살리고자 노력한 것. 그는 “대사 전달에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연습 한 달 후 노래를 들은 길 메머트 연출이 ‘르베이와 쿤체가 원하던 음악’이라며 인정해주기도 했다”고 웃었다.
카이와 베토벤의 인연은 10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는 박효신, 박은태 등으로 이뤄진 베토벤 역 캐스팅에서 유일한 클래식 성악 전공자다. 서울예고 음악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성악과에서 학사와 석·박사까지 거쳤다. “베토벤 가곡은 평이 갈리는 편이에요. 학창시절 모두가 베르디와 슈베르트를 노래할 때 저는 베토벤 가곡을 사랑했습니다. 고전적인 구성에서 느껴지는 여백은 사람을 사색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최근 가장 즐겨듣는 건 베토벤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op.98)’라고.
괴팍하면서도 다감했고, 오만하면서도 겸손했던 베토벤의 모순을 카이는 ‘인간적’으로 받아들이며 소화했다. 그는 “귀족과 대중 모두의 취향에 맞추면서 자신의 음악적 세계관까지 지켜야 했던 베토벤에게 음악은 ‘결코 좋아서 한 일만은 아니었다’는 데 애정을 느꼈다”며 팝페라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 시절을 떠올렸다. “성악을 공부한 뒤 크로스오버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나만의 길을 찾은 것인 동시에 세상과의 타협이기도 했죠”.
초연인 만큼 서사가 매끄럽지 않고 귀에 꽂히는 넘버가 부족하단 평도 나온다. 극 초반 ‘사랑은 욕망일 뿐’이라던 베토벤은 돌연 사랑에 빠진다. 덜컥이는 감정을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적인 면모”라고 봤다. 카이는 괴테 원작에 기반한 뮤지컬 ‘베르테르(2020년)’에서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연기했다. “베르테르는 권총 자살을 했고 베토벤은 여생을 사랑 없이 음악으로만 채웠어요. 이뤄질 수 없음에 굴복한 게 아니라 둘 다 자기 방식대로 영원한 사랑을 쟁취한 거죠. 현실에서 괴테를 싫어한 베토벤도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작품을 하늘에 있는 베토벤이 본다면 “21세기 한국에선 내 음악을 이렇게 기려주는구나 박수칠 것”이라고도 했다.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이 그랬듯 위대한 시작은 늘 이질감에서 와요. 작품은 초연을 거치며 꾸준히 발전할 겁니다. 베토벤이 그랬듯 더 나은 연기와 노래를 보여드리고자 고군분투 하겠습니다”. 3월26일까지, 8만~17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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