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글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댓글은 진지하고 역사를 탐구하는 내용의 비율이 높으신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분들은 일제 시절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던 역사를 얘기하시죠. 이후에도 굵직한 특종 사례를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기록에도 누군가의 땀과 열정이 들어가 있다는 걸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창간 초기였던 1920년대 신문을 만들던 분들은 주 7일을 근무하며 한반도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365일 매일같이 기사로 쓰고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비록 4페이지이거나 많아봐야 8페이지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 납활자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엮고 겨우겨우 찍은 사진을 어렵게 인쇄해서 세상에 내놨을 겁니다. 특히 사진은 보통 하루치 신문에 1장 또는 2장 정도 게재가 됩니다. 그만큼 사진을 찍기도 어렵고 인쇄하는 것도 기술 측면이나 비용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겁니다. 지난 3회째 ‘백년사진’ 글에서 사진 대신 광고 이미지를 보여드렸던 이유도, 일주일치 신문을 다 뒤져봐도 별로 그럴듯한 사진기사를 찾기 어려워서였을 것입니다.
▶ 그럼 이번 주에도 시간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100년 전 이번 주 사진 중에 가장 눈에 띈 사진입니다. 1923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본정(지금의 충무로)의 일본인 상가 밀집 지역에 화재가 났는데 일본식 가옥이라 불이 순식간에 번져 피해가 컸다는 보도입니다. 상가 30채가 전소되고 12채는 반쯤 타버렸습니다. 최초 발화지점은 정육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관할 사법담당이 정확한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합니다.
▶ 사건사고는 사진기자들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딘가에서 터져버린 비극을 기록해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재발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뭐 그런 의미로 보도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신문사의 사진기자들이 뉴스 속보에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부릅뜨고 인터넷을 검색합니다. 새벽 두 시에 시내에 큰 불이 나면, 사무실에서 숙직 근무를 하던 사진기자가 회사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서 사진을 찍게 됩니다. 그래서 사진부에는 숙직실과 침대가 있습니다. 이 모습이 저에게 익숙한 사진기자들의 야근 모습입니다. 익숙한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제는 사진기자들의 야근 모습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활이었습니다. 신문사 사진부는 1년 365일 근무자가 있었고 설날이나 추석 때도 누군가는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현장 출동할 일도 많지 않은데다 현장에 사진기자들보다 먼저 도착하는 소방관 또는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화재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이 밤에 회사에서 대기할 필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심야 근무를 하는 사진기자들은 보통 오후 3시쯤 회사에 출근해서 그 다음날 오전 9시에 일반 근무자들이 출근하면 부스스한 얼굴로 퇴근을 했습니다. 신혼 시절 아침에 집으로 들어오는 저를 보면서 동네 분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하냐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그런 생활이 참 즐거웠습니다. 특히 심야 근무를 서고 평일에 쉴 수 있다는 건 ‘딴 짓’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아이의 입학식에도 갈 수 있고,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동사무소를 가기도 좋았고, 대학원을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 100년 전 저 사진을 찍은 분도 신문사 당직실에서 야근을 했을까요? 화재가 났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집에 있는 전화로 누군가 사진 찍을 일이 있다고 알려줬을까요? 많은 게 궁금하네요.
이미 다 타고 남은 숯 상태의 건물을 촬영한 걸로 봐선 화재 당시에 현장에 도착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아침에 출근해서 사고 현장으로 출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소방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좀 아쉽습니다. 어떤 복장으로 어떤 장비로 불을 껐을지 궁금하니까요.
▶기사 내용을 보면 30채의 상점이 전부 불에 탔고 12채는 반소했다고 하니, 지금의 기준으로도 사고 현장이 꽤 넓습니다. 사진이 지면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꽤 큽니다. 당시로서는 큰 사고였던 셈이죠. 그런데 사진에는 2~3채의 가게만이 보일 뿐입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이라면 근처 높은 빌딩에 올라가서 전체를 보여주는 사진을 찍거나 드론을 띄우려고 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진 찍는 분이 높은 사다리를 쓸 수도, 올라갈 높은 건물도 없었을 것입니다.
숯덩이만 보이는 사진이지만 사고의 처참함은 잘 전달되지 않나요? 어쩌면 높은 곳에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찍는 사고 현장 사진만이 사고현장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진에는 정답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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