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겨울숲으로 가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송곳같은 칼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버텨내는 겨울나무에는 눈꽃, 얼음꽃, 서리꽃이 피어난다. 상고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다.
나뭇가지에 맺힌 얼음꽃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탈 보석이다. 강원도의 높은 산에서 ‘살아천년, 죽어천년’을 산다는 주목(朱木)과 하얀 눈밭에서 눈처럼 시린 은세계를 펼쳐내는 자작나무까지. 겨울산을 지키는 나무에게서 진정한 고독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발왕산 천년주목숲길
고산지대의 능선에는 다른 큰 나무를 볼 수 없다. 붉은색 줄기에 푸른 잎을 가진 주목만 드문드문 서 있을 뿐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에서 태백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한민족의 끈기와 인내를 상징하는 주목은 오래 살고 죽어도 잘 썩지 않는다. 말그대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다.
주목은 왜 그렇게 높고 추운 산에서 더 잘 살아가는 것일까. 주목은 1년에 불과 몇cm 밖에 자라지 않아 성장이 느린 나무로 유명하다. 쑥쑥 자라는 나무와의 경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늘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주목의 선택은 과감하게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있지만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혹독한 환경에서 자발적 고립과 무한한 인내를 선택한 것이다. 주목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강추위와 칼바람을 견뎌내며 천년을 살아간다. 푸른 하늘이 가까운 발왕산 정상이, 주목에게는 바로 블루오션이다.
강원 용평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곳엔 천년주목숲길이 있다. 50주년을 맞은 용평리조트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발왕산 모나파크(Monapa가)가 지난해 만든 숲길이다. 발왕산 정상부에 잘 보전된 주목 군락지를 발견한 모나파크는 수년간 산림청, 평창군과 협의해 주목을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생태를 살린 무장애 데크길(3.2km)을 조성했다.
케이블카를 타면 15분 만에 용평스키장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발왕산 정상에 있는 드래곤캐슬에 도착한다. 모나파크 스카이워크에 서면 선자령, 안반데기, 황병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밖으로 나오면 발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눈꽃, 얼음꽃 요정이 살고 있는 상고대가 핀 나무들을 지나면 천년주목숲길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욕심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서 그럴까. 천년을 넘게 산 주목들은 속이 텅 비었다. 참선의 나무, 고뇌의 주목, 왕발나무 주목….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명의 싹을 띄워온 나무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 담긴 이름이 붙어 있다.
‘고해의 주목’은 나무 안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텅빈 공간이 있다. 나무에 감싸여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컴컴한 나무 속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진다. 고해와 명상 끝에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빛!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고 조성했다는 천년주목숲길은 걷다보면 데크길 위로 드리워진 나무들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한다. 누구나 자연 앞에 몸을 낮춰야 하는 ‘겸손의 나무’다.
오래된 주목의 텅빈 몸통에는 다른 나무의 생명이 싹트는 경우도 많다. 성인 세 명이 안아야 감쌀 수 있는 둘레 4.5m의 ‘어머니왕주목’의 몸통 한 가운데에는 마가목의 가지가 삐쭉하게 뻗어나와 있다. 마치 나무가 출산하고 있는 장면처럼 보인다. 어머니왕주목은 작은 마가목을 품에 안고 키운다.
인근에는 든든한 어깨로 발왕산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아버지왕주목’도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왕수리부엉이가 이 나무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신령스럽게 보인다.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은 발왕수(發王水) 가든에서 마무리된다. 발왕산의 순백의 눈이 스며든 맑은 석간수가 매일 410톤이나 쏟아지는 곳이다. 천연미네랄을 함유한 발왕수는 톡 쏘는 맛이나 쇠맛 없이 깔끔하고 시원한 물맛을 자랑한다. 모나파크에서는 발왕산 정기가 담긴 이 물로 발왕산 막걸리와 김치를 만든다.
발왕산에는 또다른 명품 겨울숲이 있다. 발왕산 애니포레에 있는 독일 가문비나무 숲이다. 애니포레는 울릉도에서 산나물이나 고로쇠물을 채취할 때 쓰는 작고 느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간다.
이 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이주한 터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가 국내 최대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쭉쭉 뻗은 독일가문비나무 숲에서는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발왕산의 기(氣)를 느끼며 걷다보면 호흡이 맑아지고 머리도 상쾌해진다.
날이 풀리면 독일가문비나무 숲 속에서는 요가 클래스도 열린다. 이 곳에는 알파카 농장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알파카는 푸들이나 비숑같은 반려견처럼 몽글몽글한 털이 있어 귀여움 그자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마치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에 온 듯한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닥터 지바고’ 영화에서 나오던 라라의 테마 음악이 들릴 듯하다. 연인인 라라가 자작나무 숲 사이로 썰매를 타고 떠나가던 모습을 바라보던 지바고의 눈빛도 떠오른다.
북유럽과 시베리아, 우리나라 함경도, 일본 홋카이도 등 추운 지방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뽀얀 수피가 아름다운 수종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4~95년까지 41만 평에 69만 그루를 심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주차장에서 내려 약 3,5km 임도를 걸어야 한다. 눈이 와 있는 요즘에는 등산화와 아이젠이 필수다. 입구에서 1시간 쯤 걸으니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눈부신 수피가 뿜어내는 은(銀)세계. 하얀 눈밭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의 첫 느낌은 포근함이었다. 숨어들기 좋은 숲이다. 자작나무의 수피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늬들이 있다. 산모양, 호미모양, 달팽이 모양…. 처음엔 상처처럼 보였는데 나무의 입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자작나무 숲에 있는 수백그루의 나무들이 입을 벌려 나지막히 속삭였다. 자작나무 숲에서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새하얀 나무 껍질 하나로 버틴다. 자작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만져보니 의외로 부드러웠다. 하얀 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보온을 위해 종이처럼 얇은 껍질을 겹겹이 입고 있다. 겨울 등산을 할 때 두꺼운 옷 한 벌보다는 얇은 옷 여러벌을 겹쳐 입는 것이 좋다는 법을 자작나무도 아는 것 같다. 자작나무는 얇은 껍질 사이에 풍부한 기름성분까지 넣어 나무의 근원인 부름켜(형성층)가 얼지 않도록 한다.
두께 0.1~0.2mm 남짓한 흰 껍질은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쓰였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를 비롯해 서조도(瑞鳥圖) 등은 자작나무 종류의 껍질에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일까. 인제 자작나무 숲에는 방문객들이 자작나무 껍질에 낙서를 하거나, 껍질을 벗겨 훼손된 나무가 있었고, 이를 금지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란 이름은 작위를 받은 귀족같은 풍모에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는데, 탈 때 ‘자자작자작’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서 부엌 한 구석에 불쏘시개로 놓여 있던 나무였다. 결혼식 등 경사스러운 날에 불을 켜는 ‘화촉을 밝힌다’는 표현 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