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독립박물관에 묘비 탁본 49점 기증
방치 사적지 보존해 역사 기억해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속 인물인 방영근은 을사늑약 직전인 1904년 집안 빚 20원을 갚기 위해 ‘미지의 땅’ 하와이로 간다. 그리고 땡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저녁이면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적신다. 이는 실제 1900년대 초 고국을 떠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1세대 이민자들의 삶의 풍경이었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간 102명의 ‘방영근’들로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올해로 120주년을 맞았다. 지난해부터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세대 이민자들의 묘비를 탁본한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82)이 탁본 49점을 기증하기 위해 3일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이날 이 소장은 독립기념관 겨레의집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하와이 1세대 이민자 모두가 독립유공자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 약 7400명 중 미주 본토로 건너가거나 환국하지 않고 남은 이민자는 4000여 명. 이 소장에 따르면 전명운(1884∼1947), 장인환(1876∼1930) 의사가 재판에 넘겨지자 하와이 이민자 2018명이 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재판기금 모금에도 1595명이 힘을 모았다.
하지만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하와이 초기 이민자 중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은 70여 명에 불과하다. 이 소장은 최근 3년 동안 1세대 이민자들의 묘비 조사에 주력했다. 묘비를 통해 1919년 대한부인구제회 결성에 참여한 백인숙 선생(1873∼1949) 등의 신원을 파악하기도 했다. 백 선생은 한인신문 등에 활동이 기록돼 있지만 인적 사항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소장은 “탁본에서 파악된 정보 등을 바탕으로 열두 분이 지난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고 했다.
이 소장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각각 사회학·도시계획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30년간 도시계획 전문가로 활약했다. 2004년 잘되던 사업을 접고 이민사 연구에 발을 들였다. 이 소장은 “호랑이가 없어 토끼가 왕 노릇을 한 것”이라며 몸을 낮췄다. “이민사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일을 하려면 이중 언어를 구사하면서 주, 시 정부가 돌아가는 구조를 꿰고 있어야 했어요. 도시계획 분야에서 쌓아온 인맥이 이민사 연구에 도움이 됐죠.”
이 소장은 192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주도해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조성했던 ‘동지촌’ 숯가마 사업 터 관리를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동지촌은 사탕수수 농장을 떠난 한인 이민자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의도 면적보다 넓은 약 960에이커(약 388만 ㎡)의 땅을 사 농사를 짓고 목장과 숯가마 등을 운영했던 곳이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로 지정은 됐지만 숯가마 내부 시설은 녹슬었고, 접근하는 길은 수풀이 우거진 상태다.
“방치되다시피 한 사적지를 지금이라도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120년 전 이민자들이 역경과 고초 속에서도 고국의 독립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을 겁니다.”(이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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