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통해 이상-기형도에 매료
“역사적 폭력 속에서 존재 되찾아”
◇다른 생의 피부/클로드 무샤르 지음·구모덕 옮김/163쪽·1만4000원·문학과지성사
프랑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클로드 무샤르가 들려주는 일화다. 남도의 한 식당에 앉아서 소설가 이청준(1939∼2008)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청준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불이 꺼지는 게 무서웠소.” 이 말에 무샤르의 얼굴이 눈물로 젖는다. 국그릇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그에게 이청준이 미소 짓는다.
무샤르는 1941년 프랑스 중부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가 영국군으로부터 탈환했던 오래된 도시 오를레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폭격의 공포를 오랜 기억으로 품고 있는 프랑스인이 6·25전쟁의 동족상잔을 겪은 한국인과 공명했던 것이다.
시 계간지인 ‘포에지’의 부편집장이자 파리8대학 교수였던 그는 이청준을 비롯해 황지우, 김혜순, 송찬호 등의 작품을 프랑스에 번역 소개했다. 황지우의 시구에서 제목을 따온 평론집인 ‘다른 생의 피부’는 피부를 촉진(觸診)하듯 다른 언어를 번역한 30여 년의 기록을 엮었다.
외국인의 한국 음식 ‘먹방’이 인기를 끌듯 프랑스인이 한국문학을 읽는다고 하면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문화적으로 비대칭적인 이 상황의 위험을 저자는 의식하고 있다. 세계화라는 명목 아래 다른 문화를 싸잡아버릴 위험이다. 시를 번역문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따른다. 그런데 왜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걸까.
1990년대 파리8대학에 한국 유학생들이 도착했다. 한 학생이 수줍어하면서도 용감하게 던진 이야기에 저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문학을 감지했다. 이상과 기형도라는 낯선 이름은 그에게 역사적 폭력 속에서도 존재를 되찾는 시의 힘으로 다가왔다. 한국 학생들의 열정과 저자의 섬세함이 만나 공동 번역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번역의 묘미는 새로운 발견에 있다. 클로드 무샤르는 ‘인생은 60부터 시작’이나 ‘신바람’ 같은 흔한 한국말을 빛나는 자유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기형도의 유명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예정된 죽음이 아니라 “은밀한 반란”을 읽어내며 이상의 추상시가 ‘프랑스, 일본을 거쳐 수용한 초현실주의를 자신의 세계문학으로 변화시킨 도발’이라 평한다. 이처럼 문학 번역에서는 “갑자기 보이던 것이 안 보이게 되며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 무샤르의 시적인 비평을 섬세하게 번역해낸 역자 구모덕의 말이다.
이청준과의 만남에서 통역을 맡은 학생이 모든 내용을 전하지 못할 때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말의 내용만이 아니라 말소리, 표정, 대화 자리에 테두리 없이 열려 있는 집중의 시간. 이청준의 말에 흘린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처음 느낀 각별한 감정이었다. 독자가 많지 않은 시 전문지를 오래 편집해 온 노편집자가 목적의식이 아니라 감각에 투철한 모습 또한 시의 힘으로 다가온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