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니 친구들이 낙엽지듯 떠나가… 최근 내 詩에 ‘노병사’가 많아진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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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시집 펴낸 김광규 시인
‘ㄷ으로 시작되었어, 그다음에 ㅁ이…’
기억력 떨어진 일상 그려낸 ‘달맞이’
“詩는 존재 이유, 힘닿을때까지 쓸것”

최근 열두 번째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을 출간한 김광규 시인. 서울 서대문구에서 13일 만난 그는 신작 시집을 손에 든 채 
“때 없이 떠오르는 시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생 펜과 노트를 품 안에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최근 열두 번째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을 출간한 김광규 시인. 서울 서대문구에서 13일 만난 그는 신작 시집을 손에 든 채 “때 없이 떠오르는 시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생 펜과 노트를 품 안에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비록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메마른 사막에 감춰진 수맥이라도/촉촉하고 부드럽게 살려내는/그 짧은 글이 바로 시 아닌가’

김광규 시인(82)이 최근 출간한 열두 번째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시 ‘그 짧은 글’이다. 반세기 가까이 시를 써온 원로 시인의 철학이 담겼다. 1975년 등단 후 누구나 읽기 쉬운 명징한 언어로 시를 써온 김 시인을 13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나는 변화보단 지속을 추구해왔다. 포부를 갖고 시를 쓴 적은 없다. 나의 체험 세계가 현실에 부딪힐 때 불꽃이 튀어 써온 것”이라고 했다. 이번 시집엔 그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간 발표한 60편의 시가 수록됐다.

그는 70대 중반을 넘기며 많은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엔 저물어가는 삶을 비춘 시가 적지 않다. 김 시인은 “70대 후반이 되니 친구들이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떠나갔다. 소설가 조세희(1942∼2022)도 가깝게 지낸 사이”라며 “시를 꾸며내지 않으니 노년기의 내가 쓴 시는 ‘생로병사’의 ‘노병사’를 다룬 게 많을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ㄷ으로 시작되었어/그다음에 ㅁ이 뒤따랐지!/달……마…… 로 이어지는 그 이름/사흘 만에 어렴풋이 되살아났다’라는 시 ‘달맞이’는 노화로 인해 기억력 감퇴를 겪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렸다. 미물의 작은 속삭임까지 포착해 울림을 전하는 김 시인의 시선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까마귀 짖는 소리 끊어진 다음에야/문득 알아차렸다/늦가을 마당에 정든 식구 남겨두고/줄무늬고양이 우리 곁을 떠났구나’(‘늦가을 마당’)

그가 시를 처음 만난 건 서울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다.

“살면서 ‘남들보다 잘한다’는 말을 스승인 조병화 시인과 김광식 소설가 등 글 쓰는 사람들한테서 처음 들었죠. 그래서 ‘아, 내가 할 일은 이거다’ 생각했죠.”

1970년대 시대적 상황을 풍자한 시 ‘안개의 나라’는 그가 꼽는 대표작이다.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10여 개 언어로도 번역돼 해외에서도 널리 읽혔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쉬운 시를 쓰는 비결을 묻자, 그는 “스무 번 가까이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이라며 “요즘 주종을 이루는 난해한 시 또한 고뇌의 고뇌를 거쳐야 나오기 때문에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을 ‘방금 떠올랐던 생각/귓전을 스쳐 간 소리/어떻게 되살려낼까/궁리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2016년 서대문구 안산을 오르다 다쳐 거동이 불편한 김 시인은 “걷는 게 가장 큰 위안인데 못 하니 아무래도 슬프다”면서도 시를 쓰기 위한 궁리를 계속해 나가겠단 의지를 내비쳤다.

“힘닿을 때까지 시를 써야죠. 나의 레종데트르(존재의 이유)이니까요.”

#김광규 시인#12번째 시집#노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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