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와 술은 불가분의 관계다. 원나라 방회는 시인 중 술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마실 줄 모르더라도 늘 술을 읊는다고 적었다(‘瀛奎律髓’ 酒類). 당나라 백거이는 일찍이 술 마시길 권하는 ‘권주(勸酒)’ 시 연작을 남겼다. 조선 전기 문신 유호인(1445∼1494)은 이를 이어받아 다음 시를 썼다.
시인은 말을 더듬었지만 뛰어난 시적 재능으로 성종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세파에 시달리다 어느덧 장년이 됐다. 3·4구의 날개 펴길 두려워하는 상처받은 기러기와 재갈을 견뎌내지 못하는 늙은 말은 각각 소식(‘杭州牧丹開時’)과 굴원의 시(‘離騷’)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자신을 상징한다. 이제 시인은 찾는 이조차 없는 고적한 처지가 돼 벼슬은 꿈에서나 바랄 일이 됐다. 마지막 두 구는 “이럴 때 술 한 잔 없다면”이란 백거이 시의 표현을 따와 자신의 상황을 얹었다.
백거이의 ‘권주’ 시에는 ‘어느 곳에서든 술 잊기 어려워라’ 외에도 ‘차라리 와서 술이라도 마시는 것이 낫네(不如來飲酒)’라는 제목의 연작시가 더 있다. 이들 시에선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미끼를 문 물고기나 등불에 다가가다 타버리는 나방처럼 사람을 파멸시킨다며 화를 다스리려면 마음속 칼을 갈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술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만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2022년)는 색다르다. 마르틴은 과거 촉망받던 교사였지만 지금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무기력한 중년이다. 그는 인간이 혈중 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심리학자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동료로부터 듣고 자신에게 이를 적용한다. 그리고 음주를 통해 활력을 되찾는다. 한시에서 현실적 고민을 풀어내기 위해 술 한 잔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보다 더 적극적인 음주 예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음주의 부정적 결과도 함께 비춘다. 마르틴과 동료들은 음주를 통해 일시적으로 행복을 찾지만, 과도한 음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술은 안 마시는 것보다 절제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실패에 대한 좌절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기 어렵다면 술이라도 마시는 편이 낫다. 백거이는 “차라리 와서 술 마시고, 눈감고 몽롱하게 취하는 편이 낫다(不如來飮酒 合眼醉昏昏)”(‘不如來飲酒’ 네 번째 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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