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많은 유물을 관람객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관람객의 마음에 남기는 겁니다.”
2020년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실 재개관 프로젝트를 맡은 이원진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박물관은 기증 유물 5만여 점 가운데 1408점을 한꺼번에 전시해왔던 이전 기증실을 탈바꿈했다. 많은 유물을 한자리에 전시하며 각각의 유물을 집중 조명할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새 단장한 기증Ⅰ실 오른쪽에 마련된 144㎡(43평) 규모 독립 공간에는 단 한 점, 보물 ‘손기정 기증 청동투구’가 놓여 있다. 바닥부터 벽면, 천장까지 어두컴컴한 가운데 유물을 비추는 조명만이 반짝인다. 전시장 밖 벽면에는 1936년 손기정 선생(1912~2002)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부상으로 받았던 그리스 청동 투구가 1986년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한 글이 채워져 있다. 리모델링 전에는 관람객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곳이 이제는 남녀노소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상설전시실의 변화는 2, 3년 전부터 나타난 흐름이다. 개관한 지 10년이 넘은 노후 상설전시실을 새 단장하면서 문화 소양이 높아진 관람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전시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그러면서 전시 유물의 양을 줄여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상설전시실의 명품화’가 이뤄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1년 3월 ‘분청사기 백자실’을 처음 탈바꿈한 뒤 최근까지 ‘사유의 방’, ‘청자실’, ‘기증실’을 전면 리모델링해왔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다른 지역 박물관에도 이어진다. 박아연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과거에는 특별전시가 박물관의 주력 사업이었다면 이제 상설전시실 재개관이 주력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틀에 박힌 동선을 탈피하는 실험도 상설전시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새 단장한 ‘불교조각실’에는 동선이랄 게 없다. 경주박물관은 전시실을 전면 리모델링하면서 기존 유물 137점 가운데 절반을 들어냈다. 새 전시실에 70점만 추리자 정원에 놓인 조각상처럼 툭툭 커다란 불상을 전시실 군데군데 배치할 여유가 생겼다. 박 학예연구사는 “박물관이 관람객에게 동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능동적으로 전시실을 거닐며 유물을 선택해 볼 수 있는 구조로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관람 금지구역이었던 유물 뒤편도 공개하는 파격 시도도 선보였다. 177㎝ 크기 국보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옛 불교전시실에서는 전시장 벽면에 딱 붙어 있어 뒷면을 살펴볼 수 없었다. 반면 새 단장한 불교조각실에서는 관람객이 불상 주위를 돌면서 머리와 몸통 뒷면에 난 커다란 구멍까지 살펴볼 수 있다. 조효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관람객이 불상 뒷면을 보면서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상상해보길 바랐다”며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관람객 스스로 유물의 진면목을 발견하도록 하는 취지”라고 말했다.
옛 유물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12월 27일 ‘과학문화실’을 전면 리모델링하면서 국보 ‘천상분야열차지도 각석’에 디지털 맵핑(물체 표면에 그래픽을 입히는 작업)을 시도했다. 김충배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기획과장은 “각석 표면에 1467개의 별과 295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지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유물 표면 위에 실감 영상을 띄워 각각의 별자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시 개편의 이유”라고 설명했다.
공간디자인스튜디오 ‘논스탠다드’의 이세영 대표는 “소장 컬렉션을 선보이는 상설전시야말로 박물관의 근본”이라며 “유료로 운영되는 기획전시실뿐 아니라 무료로 운영되는 상설전시실의 품격이 높아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관람객의 영향력과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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