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상 속 심리적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다면 이메일(best@donga.com)이나 댓글로 알려주세요. 기사로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점심으로 뭐 먹을까?”
“글쎄, 난 아무거나. 넌?”
“음, 나도 아무거나.”
여기서부터 대화가 좀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뭐 먹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고민이지만 시원하게 결정하는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99년 짬짜면이 등장한 이후 ‘짜장 vs 짬뽕’ 고민은 어느 정도 해결된 듯도 하지만 여전히 메뉴 선택은 어렵다. 옷장 앞에 서서 하는 “오늘 뭐 입지?”라는 고민도 마찬가지다. 누가 대신 좀 정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많다.
결정은 원래 피곤한 것
‘메이비(maybe)족’은 “글쎄요”라는 애매모호한 대답만 할 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의견에 의존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햄릿증후군’과 같이 똑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향을 의미하는 또 다른 용어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결정장애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이는 정식 진단명이나 학술용어는 아니다.
심리학, 경영학 등의 연구에서는 사소한 문제조차 결정을 어려워하는 것을 두고 ‘의사결정 피로감’(decision fatigue)이라고 지칭한다. 학술 주제로 연구까지 됐다니 국가를 막론하고 결정은 원래 피곤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가지고 있는 면이기도 하다.
캐슬린 보스 미국 미네소타대학 경영학부 교수 연구팀은 의사결정이 얼마나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여러 실험을 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연구팀은 쇼핑몰에서 만난 쇼핑객들이 이날 물건을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결정을 했는지 묻고,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도록 요청했다. 결과는 많은 의사결정을 한 사람일수록 수학 문제를 끝까지 풀지 못하거나 답을 틀린 경우가 많았다. 보스 교수는 “선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집중력을 유지하기 훨씬 어려워했다”고 했다.
옵션이 많을수록 유리할까? 5~10개가 적당
결정이 피곤한 가장 큰 이유는 100% 완벽한 정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선택지를 비교해볼 수 있어야 안심이 된다. 문제는 모든 선택지의 정보를 모으는 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다.
겨울 코트를 사기 위해 온라인쇼핑몰을 검색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검은색, 20만 원대’ 두 가지 조건을 넣고 검색했더니 코트 수백 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적당히 비교해보고 1시간 만에 결제했고, 다른 한 사람은 가격, 소재, 배송, 후기 정보를 비교하고 따지느라 밤을 새우고도 코트를 사지 못했다. 둘 중 어떤 사람이 쇼핑 과정이 더 행복하게 느껴질까. 또 ‘득템’의 기쁨은 누가 더 클 것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폼페우 파브라 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우리가 사소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선택지의 수는 5~10개 사이라고 한다. 5개 미만일 때는 선택지가 적어서 불만족스럽게 여겨지고, 10개가 넘어가면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한 게 아니라 적당히 있을 때 쉬운 결정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 자체도 기회비용이 든다
신지웅 예일대 경영학부 교수와 댄 애리얼리 듀크대 경영학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헤매다가 결국 손해 보는 불리한 결정을 내린다.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때 들어가는 기회비용 때문이다.
연구팀은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문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방문이 열리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고, 방마다 2~14센트 사이의 보상금을 무작위로 배치했다. 방 안에서는 세 가지 색 문이 또다시 나오는데, 게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3개의 방문을 열어보며 보상금을 모으면 된다. 마우스를 100번 클릭하면 게임이 끝난다. 만약 선택을 번복하고 다른 색 문을 열려면 3센트의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두 번째 그룹에는 일부 조건을 변경한 실험을 했다. 빨간 문을 클릭하면 선택하지 않는 나머지 초록색, 파란색 문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게 했다. 15번 이상 클릭하지 않으면 아예 사라지도록 했다.
두 그룹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돈을 모았을까? 첫 번째 그룹이었다. 두 번째 그룹은 선택하지 않은 문들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자 자꾸 결정을 번복하고 우왕좌왕하며 작아진 문을 다시 클릭했다. 그때마다 대가로 3센트를 지불했다. 결과적으로 수익의 14%를 기회비용으로 날렸다. 문이 쪼그라들면서 선택지가 없어질까 봐 마음도 같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선택지를 유지하는 데 비용이 들지 않는 세상이라면 이러한 경향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하지만 대부분의 일상적 상황에서는 선택지를 열어두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정하기 전 눈치 보는 한국인
신경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인지하면 행복감을 느끼는 호르몬인 도파민 분비가 정지된다고 한다. ‘실수=불쾌감’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여기에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한국 문화가 더해지면 실수에 따른 불쾌감은 더욱 증가한다. 작은 선택으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실수했다고 평가받지는 않을지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식당에서 메뉴판을 보며 꼭 먼저 상대방의 의사를 묻지 않던가.
타인을 의식하며 눈치 보는 문화는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고 최상진 중앙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한국인의 심리학’에서 한국인은 자신에 대한 상대의 평가, 호감 등을 크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주변 사람을 거스르지 않는 의견을 내도록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눈치 보는 특성이 나타나는 이유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자신의 체면이나 인상 관리 △평가 염려 △부드럽고 원만한 대인관계 유지 등을 꼽았다.
성장기에 입고, 먹는 것부터 학원, 진로까지 부모가 대신 선택해주며 자란 청년들은 선택을 더욱 어려워한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를 뿐 아니라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일일이 의견을 물어보는 경우도 많다. 성장기에 스스로 했던 선택에 대해 비난 받은 경험이 있다면 더욱 심하다. ‘나는 결정장애가 있어요’의 저자 임재호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교수는 “선택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후회, 손실, 비난 등을 받게 되고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며 “서로의 생활에 깊게 관여하는 가족문화를 지닌 경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상대방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려는 간섭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에게 최선인 답은 있을 수 있어도 100% 완벽한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택의 완벽주의를 버리고 단 10, 20%만이라도 진짜 원하는 바를 선택하면 된다. 또 지금 내리는 결정이 최종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없다’의 저자 요헨 마이는 “완벽한 정답은 실험실에는 있지만 현실에는 없다”며 “실수해도 세계는 멀쩡히 돌아가며, 실수를 한다 해도 대부분 나중에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정의 주체는 ‘남’이 아닌 ‘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한 결정을 하는 것은 타인을 기분 좋게 할 수는 있어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 ‘선택과 결정은 타이밍이다’의 저자 최훈 작가는 “기준이 내가 된다는 것은 삶의 주인공이 내가 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라며 “‘나’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선택과 결정을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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