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뷰/존 르 카레 지음·조영학 옮김 /288쪽·1만8000원/알에이치코리아
스파이물의 장르적 쾌감보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 고민 안겨
일찌감치 물려받은 유산 덕분에 편안한 삶을 살던 젊은 부자 줄리언 론즐리. 그가 더 단조로운 생활을 위해 황량한 영국 북해 해변 마을에 연 작은 서점. 손님 하나 없던 서점에 어느 날 찾아온 노신사 에드워드 에이번. 서점 지하의 빈 공간을 ‘문학 공화국’으로 만들어보자는 노신사의 기묘한 제안….
이 책은 ‘007’ 시리즈의 이언 플레밍과 쌍벽을 이루는 첩보 소설의 제왕 존 르 카레(본명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월·1931∼2020)가 마지막으로 쓴,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유작 소설이다. 그는 실제로 영국 비밀정보국에서 스파이로 활동하며 작품을 썼는데, 3번째 작품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히트하자 사표를 내고 작가로 전업했다. 본명 대신 필명을 사용한 이유도 첫 소설을 쓸 당시 신분이 정보요원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비밀정보국 출신의 첩보 소설가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르 카레와 플레밍의 작품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을 정도로 느낌이 다르다. 007 시리즈가 술과 여자, 도박을 좋아한 이언 플레밍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들은 대부분 사실적이고 회색적이다. 또 007 시리즈가 영국식 ‘국뽕’과 선명한 선악을 담았다면, 르 카레의 작품들은 선악의 구별이 모호하다. 대부분의 주인공은 남다른 충성심으로 무장한 채 조국과 조직을 위해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도덕과 정의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을 보게 되고 동시에 그렇게 자신이 지켜낸 조국의 어두운 이면에 절망한다.
신간에서도 영국이 취한 외교적 자세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비윤리적 행동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곳곳에 담겨 있다. 실제 그의 삶도 그가 쓴 소설과 다르지 않다. 그는 2019년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책 ‘에이전트 러너’에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추진한 정치인들을 강하게 비판했고, 급기야 사망 직전 영국 국적을 버리고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실체는 모두 스파이다. 냉전 직후 벌어진 정치적 사건들을 시점과 배경을 바꿔 21세기 영국으로 가져온 뒤 스파이 조직이 가진 정치적 양면성을 입혀 사건을 풀어간다. 그 안에 정파적 이해로 점철되고, 반드시 품어야 할 사람들에게조차 등을 돌리는, 종종 인간의 존엄성도 외면하는 첩보의 실체를 담았다. 소설에서 그려진 영국 스파이들은 조국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 간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가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유작 원고를 정리해 신간을 출간한 아들 닉 콘월은 이와 관련해 “내가 보기에 아버지도 그 얘기를 큰 소리로 외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가 20세기 중반 갈 곳 없는 떠돌이였을 때 집을 마련해준 기관이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이미 4분의 3 정도가 완성된 상태였음에도 작가가 생전에 이 소설을 출판하지 않은 것은 이런 고민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거장이 남긴 작별 인사고, 자신의 전직(스파이)에 대한 러브스토리라는 해석은 타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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