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럽과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라익스미술관의 전시 ‘베르메르’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제 주변에도 이 전시만을 보기 위해 네덜란드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지 고민하는 분이 계실 정도로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시인데요.
개막 전부터 사전 티켓 10만 장의 예약이 마감되더니, 개막 후에는 입장권 45만 장이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6월까지 열리는 전시를 놓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전시에 왜 이렇게 많은 관심이 쏠리는지, 또 어떤 작품들이 나왔는지 소개하겠습니다.
기획 기간 7년…생애 다시 보기 힘들 전시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활동했으며, 살아있는 동안 그림을 팔아 11명의 자녀를 키우며 어렵지 않게 살았지만 말년엔 가난해져 빚을 남기고 떠난 예술가. 베르메르는 15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이중 4명은 출생 직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요하네스 베르메르(페르메이르·1632~1675)에 대해 알려진 거의 전부입니다. 편지나 일기 등 그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도 없고, 남긴 것은 오로지 그림 약 37점 뿐이죠. 보통 우리가 미술관에서 보는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터무니 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이번 라익스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그 중 28점을 모았습니다. 베르메르의 작품 대부분을 볼 수 있는 기회인 셈인데요. 준비 기간만 7년이 걸렸다는 이 전시는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운송료가 치솟아 당분간은 다시 기획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또 오래 된 작품들은 한 번 전시를 하고 나면 보존을 위해 얼마간은 수장고에 다시 머물러야 하죠. 이 때문에 베르메르의 작품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을 한 관객들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작품이 전시에 나온 것일까요? 그리고 그 작품 속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요.
전시의 첫 출발은 베르메르가 살았던 델프트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강에서 북쪽을 바라본 도시의 모습인데요. 정면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시계탑을 자세히 보면 아침 7시 풍경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서 독특한 것은 도심을 저 멀리 밝은 색으로만 그려놓고, 그림자가 드리워진 외곽의 관문을 정면에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건축을 클로즈업해 그릴 법도 한데, 그저 강물 위에 두둥실 배가 떠다니듯 차분하게 그린 것도 특징이구요.
게다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푸른 하늘을 가득 채운 회색 구름입니다. 이 그림 속 고요함과 차분함. 이것이 베르메르의 팬들을 매료시킨 요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술관 연구로 드러난 고민의 흔적들
이 전시가 준비되는 과정은 작품을 모으는 시간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작품을 과학적으로 또 미술사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를 통해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죠. 미술관은 베르메르의 새 전기를 출간했고요, 새로운 연구 결과도 발표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베르메르의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우유를 따르는 여자’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의 그림에서는 완전한 흰 벽면의 여백 앞에 여자의 모습만 두드러지게 표현이 되어 있죠. 미술관이 SWIR 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촬영한 결과, 여인의 머리 뒤 벽면쪽에 물통 거치대가 그려졌었고, 오른쪽 아래에는 큰 바구니를 그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러한 흔적을 통해 미술관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준비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베르메르가 시행착오를 거쳤음을 알게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또 그가 여러 물건들을 배치하고 삭제해가면서 ‘고요함’을 얻는 과정도 파악했다고 덧붙였죠.
이 작품에서 중요한 흔적은 바로 여인의 뒤편에 있는 큐피드입니다.
큐피드가 발견되기 전 이 그림의 벽면은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 1979년 X-ray 촬영을 통해 큐피드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베르메르가 그렸다가 지운 것으로 당시에는 생각했었죠.
그런데 2017년 안료를 분석하면서 큐피드 위에 칠해진 물감은 베르메르가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결국 아주 느린 복원 끝에 2021년 큐피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큐피드의 발 아래 놓여있는 가면까지 보여지면서 이 그림은 굉장히 암시적인 내용을 갖게 되었지요. 여인이 읽고 있는 것은 사랑의 편지이며, 거짓(가면)이 아닌 진실된 사랑을 은유하는 것으로요.
그림 오른쪽 커튼도 눈여겨보세요. 윗부분을 잘 보시면 액자에 커튼이 걸려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는 사람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일종의 장치입니다.
진주 속 반짝이는 욕망들
한 자리에 모인 그의 작품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욕망’입니다.
우리가 아주 오래 전 그림을 볼 때는 주로 왕이나 교회가 의뢰한 것을 보다보니 대놓고 화려한 그림에 익숙해져서, 베르메르의 그림을 ‘소박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의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옷과 가구, 텍스타일이 꽤나 화려하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인기였던 ‘진주’가 자주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그림에서 진주는 순수, 아름다움, 사랑을 상징했으며 이에 더해 값비싼 장신구이기 때문에 부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위 작품에서 보이는 진주 귀걸이는 굉장히 큰 사이즈인데요. 당시 저정도의 사이즈라면 베르메르가 소장할 수 있는 가격대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가짜 진주를 사용했거나, 베르메르가 상상으로 그려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또 위 그림에서 여인이 입고 있는 노란 재킷도 그의 그림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베르메르가 사망할 때 남긴 유품 목록에도 이 재킷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베르메르 아내의 옷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값비싼 옷을 사 그림에 활용했던 것이겠죠.
고급스러운 옷, 가짜일지라도 비싸보이는 목걸이와 귀걸이. 이 모든 것들은 베르메르가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고요함이 아니라 당시 델프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욕망을 읽게 되는 것이죠.
라익스미술관이 전시를 직접 찾을 수 없는 관객을 위해 고맙게도 28점 모두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도록 공개(https://www.rijksmuseum.nl/en/johannes-vermeer?ss=)해두었답니다. 나머지 작품도 감상하며, 수백년 전 네덜란드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만나보세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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