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 할망이 애타게 구휼미를 기다리던 포구에 펼쳐진 비단처럼 고운 붉은 노을[전승훈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4일 13시 00분


제주시 건입동은 제주의 관문이다. 육지와 섬을 오가는 상인들과 유배 온 학자에  얽힌 역사적 흔적이 많다. 해질녘에 사라봉 언덕의 북쪽 끝자락인 산지등대에 올라서면 붉게 물든 노을과 제주항의  불빛, 육지로 향해 이륙하는 비행기의 모습까지 이국적인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시 건입동은 제주의 관문이다. 육지와 섬을 오가는 상인들과 유배 온 학자에 얽힌 역사적 흔적이 많다. 해질녘에 사라봉 언덕의 북쪽 끝자락인 산지등대에 올라서면 붉게 물든 노을과 제주항의 불빛, 육지로 향해 이륙하는 비행기의 모습까지 이국적인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작은 민속촌으로 재현된 김만덕 객주
조선시대 상단 비즈니스 -제주음식 체험

사라봉 언덕에서 바라보는 환상적 낙조
백년 넘은 등대에서 커피와 전시도 즐겨

김만덕 위패 모신 사당에 직함 밝힌 묘비
구휼 의인의 삶 멀티미디어로 소개


제주도의 관문인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언덕은 북쪽으로는 푸른 바다, 남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을 볼 수 있고, 발 아래로 제주 시내의 모습이 보이는 숨은 명소다. 특히 사라봉 북쪽 끝에 있는 산지등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절경이다. 바다에는 제주항의 불빛이 반짝이고, 수시로 육지로 오가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건입동은 제주의 거상(巨商) 김만덕(1739~1812)의 스토리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이자, 대재난에서 백성을 살린 의인(義人), 여성에게 금지된 꿈을 실현한 여행가였던 ‘김만덕의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CEO, 김만덕의 객주
제주 북부의 건입포는 예로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건입포 주민들은 봄이면 전북 군산-연평도-해주-신의주까지 진출한 뒤 음력 10월이면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귀향했다.

제주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 김만덕의 길.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 김만덕의 길.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만덕의 아버지도 건입포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만덕이 12살 때 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었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집에 살던 만덕은 어린 나이에 기녀(妓女)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제주 목사를 찾아가 양인으로 환속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면서 물건을 맡아주고, 팔아주고, 흥정을 붙여주는 일을 하던 집이다. 김만덕의 물산객주(物産客主)는 위탁매매는 물론이고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 전방위적인 비즈니스를 했다.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에 포함되는 건입동 산지천  산책로. 1960년대 복개했던 산지천은 자연하천으로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돼왔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에 포함되는 건입동 산지천 산책로. 1960년대 복개했던 산지천은 자연하천으로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돼왔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 북부 올레길 18코스가 시작되는 건입동에는 산지천 산책로가 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산지천은 건입동을 관통한 뒤 제주항으로 빠져나간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하여 주택과 상가 건물이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에 산지천을 복원해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현무암 돌담과 초가지붕이 있는 제주 전통가옥으로  재현된 김만덕 객주.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현무암 돌담과 초가지붕이 있는 제주 전통가옥으로 재현된 김만덕 객주.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산지천을 걷다보면 복원된 ‘김만덕 객주’를 만난다. 작은 민속촌처럼 초가지붕을 이은 8채의 제주 전통가옥이다. 당시 객주와 상단의 모습이 재현돼 있는 이 곳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한쪽 켠에는 실제 음식을 판매하는 주막도 운영되고 있다. 제주 전통 음식인 몸국, 고사리육개장 등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김만덕 객주
김만덕 객주
만덕의 사업성공 비결은 육지와 섬에서 나는 물건의 시세 차익이었다. 그는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제주마, 말총, 양태, 진주, 우황, 미역 등 특산물을 육지에 판매했고, 대신 척박한 제주로귀한 쌀과 소금을 들여왔다. ‘신용본위(信用本位)’를 내건 만덕은 적극적으로 선상(船商)을 유치하고, 관가에 물품도 공급하며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되었다고 한다.

김만덕 객주
김만덕 객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
김만덕이 조선시대 전국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 18년(1794년)의 일. 제주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갭인년 숭년(갑인년 흉년)’으로 불리는 참혹한 재난의 해였다. 가뭄과 태풍이 반복된 그 해에 거리엔 굶어죽은 시체로 가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제주 산지로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에 가면 각종 기록과 멀티미디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만덕 할망’의 행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제주 산지로 김만덕기념관에 재현된 굶주린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는 만덕 할망의 모습.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 산지로 김만덕기념관에 재현된 굶주린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는 만덕 할망의 모습.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당시 제주 목사 심낙수는 “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나부끼는 것이 마치 나뭇잎 날리는 것 같다”며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제주도로 급하게 구휼미를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구휼미를 실은 배마저도 난파돼 재난은 더욱 심해졌다. “정조 19년(1795년) 윤2월 진휼곡 5000석을 실은 배 12척 중 5척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됐다. 이즈음 제주 백성 3분의 1이 굶어 죽었다.”(정조실록)

이를 본 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내 구휼에 나섰다. 당시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여 관가에 실어나른 쌀은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명의 제주민들이 굶주림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김만덕 기념관의 유리창에서 바라본 산지포구의 모습. 유리창에는 ‘만덕할망이 제주백성에게 나눠 줄 구휼미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라보던 바다 광경’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김만덕 기념관의 유리창에서 바라본 산지포구의 모습. 유리창에는 ‘만덕할망이 제주백성에게 나눠 줄 구휼미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라보던 바다 광경’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정조는 김만덕을 높이 치하하고, 신하들에게 그녀의 삶을 널리 알리는 전기를 집필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정조는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는 롤모델로 만덕을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을 비롯해 수많은 공경대신이 ‘만덕전’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차다)’라는 글씨로 김만덕의 의로움을 찬양했다.

김만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당대의 많은 문집에서 ‘협사(俠士)’ ‘열협(烈俠)’ ‘의열사(義烈士)’라고 불렸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의로운 일을 해낸 영웅에게 던지는 찬사다. 극심한 가뭄에서 수천명의 목숨을 살렸으니 ‘구휼 의인’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행가 김만덕이 올랐던 사라봉과 산지등대
제주 사라봉 언억 산지등대에서 바라본 제주항. 붉은 노을 위로 제주국제공항에서 이륙한 여객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다.   전승훈기자 rapny@donga.com
제주 사라봉 언억 산지등대에서 바라본 제주항. 붉은 노을 위로 제주국제공항에서 이륙한 여객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다. 전승훈기자 rapny@donga.com
제주올레길 18코스의 일부인 ‘김만덕의 길’은 사라봉과 산지등대로 이어진다. 사라봉(해발 148m)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사봉낙조(沙峰落照)’라고 한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인 ‘성산일출(城山日出)’과 함께 제주의 열두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일컫는 ‘영주(瀛洲·제주의 옛 이름) 십이경’ 중 하나에 든다.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에서 제주공항까지, 제주도심에서 한라산 자락까지 탁 트인 전망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사라봉 언덕 위에 서 있는 산지등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사라봉 언덕 위에 서 있는 산지등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특히 사라봉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지등대는 밤이 깊어가면 칠흑같은 바다를 수놓는 수백척 고기잡이배들의 불빛 향연을 볼 수 있는 손꼽히는 야경명소이기도 하다. 1916년 이후로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는 15초에 한번 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수년전 무인등대가 된 후로 등대원이 머무르던 숙소는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916년 이후 100년 넘게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  15초에 한번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추는 산지등대는 제주 본섬을 향하는 배들을  인도하는 대표적인 등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1916년 이후 100년 넘게 제주 바다를 지켜온 산지등대. 15초에 한번씩 반짝이며 48km 밖 바다까지 불빛을 비추는 산지등대는 제주 본섬을 향하는 배들을 인도하는 대표적인 등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만덕은 사라봉 언덕에서 평생 여행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정조는 제주 목사에게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만덕에게 원하는 바를 들어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당시 58세였던 만덕은 “바다를 건너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혔다. 이 소원은 당시로서는 세상이 뒤집힐 일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부녀자가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면 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규정한 데다, 제주도의 평민은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출륙 금지령’이 200년이나 지속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김만덕이 임금에게 “금강산을 보고 싶소”라고 말한 것은 출륙금지령에 묶여 있던 제주도 여인들의 원망과 포부를 대변한 용감무쌍한 선언이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을 듣고 금강산 유람 뿐 아니라 한양 궁궐 구경까지 흔쾌히 허락했다. 일반 평민이 뭍으로 나오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정조는 만덕에게 ‘의녀 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도 내렸다.

만덕은 난생 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정조의 명으로 전례없는 배려를 받고 이동한 만덕은 가는 고을마다 환대를 받으며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다. 조선시대 금강산 여행은 오늘날의 해외여행과 비슷한 준비와 시간,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김만덕에 대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 썼다.

제주 사라봉 언덕의 모충사에 있는 김만덕의 묘. 남편의 이름을 앞세운 조선시대 일반적인 여성의 묘비와 달리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라는 본인의 직함과 이름이 당당히 적혀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 사라봉 언덕의 모충사에 있는 김만덕의 묘. 남편의 이름을 앞세운 조선시대 일반적인 여성의 묘비와 달리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라는 본인의 직함과 이름이 당당히 적혀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만덕은 여행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장사를 계속하면서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쌀을 주는 등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온 제주도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만덕 할망’이었다.

김만덕의 위패를 모신 모충사에는 그의 무덤도 있다. 비문에는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行首內醫女 金萬德之墓)’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묘비에 누구의 부인, 누구의 딸, 며느리로 표현함으로써 남성의 이름과 자호, 직함을 앞세우고 뒤에 숨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만덕의 묘비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과 직함, 삶의 행적이 묘비에 적혀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제주 사라봉 언덕의 모충사에 있는 김만덕의 묘. 남편의 이름을 앞세운 조선시대 일반적인 여성의 묘비와 달리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라는 본인의 직함과 이름이 당당히 적혀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제주 사라봉 언덕의 모충사에 있는 김만덕의 묘. 남편의 이름을 앞세운 조선시대 일반적인 여성의 묘비와 달리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라는 본인의 직함과 이름이 당당히 적혀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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