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피가 끓고 힘이 넘쳐흐른다. 노예적 교육제도는 철폐하고 결사, 연구의 자유를 얻어 조선민족 본위의 교육제도를 실현해야 한다. 일본제국에 끝까지 항쟁하자.”
1929년 7월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주여고보) 4학년생이던 임부득(1911~1987)은 이 같은 내용이 실린 선전물 ‘뉴쓰’를 등사해 배포하려다 발각돼 경찰에 체포됐다. 임부득을 필두로 전주여고보 여학생 19명이 결성한 비밀결사 ‘적광회’(반회)의 항일 민족운동이 처음 외부로 알려진 사건이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함께 관련 서적을 읽고 3·1운동의 항일 정신을 되새기며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고자 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민족에게 박해를 가하고 있다. 실로 조선 농민을 위해 싸울 용감한 투사는 혹은 투옥되거나 혹은 학살되었다. 게다가 심하게는 신성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압박을 가하여 학생의 언론, 집회, 연구의 자유를 빼앗고 사상 선도의 미명을 빙자하여 학생의 제적을 자행하고 있다. 그리고 경찰 당국과 협력하여 불온사상 단속의 명목으로 백주(白晝)에 학생의 검속, 고문, 투옥을 감행한다.”(‘뉴쓰’의 일부, 1930년 3월 5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에서 인용)
3·1운동 제104주년을 맞아 거의 잊혔던 여성 독립운동가 임부득이 학계에 의해 새삼 조명되고 있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18세 소녀가 식민지의 모순을 깨닫고 스스로 공부하며 조직을 만들어 주변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과정이 임부득과 관련한 사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며 “당대 여성이 지역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를 정도로 활발히 활동한 사례는 보기 힘든 만큼 임부득의 생애를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임부득의 행적은 당시 언론에도 수차례 보도됐다. 동아일보는 1929년 8월 3일 ‘여학생중심의 비사(祕社·비밀리에 모여) 격문 선포 중 발각’이라는 기사를 실어 “같은 학교 3, 4학년생을 중심으로 사상 선전을 하는 동시에 모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뉴쓰’라는 선전문 창간호를 전주 청수정(현 교동) 임부득 여사의 집에서 등사해 준비했다“고 전했다.
‘뉴쓰’의 창간 목적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이었다. 학생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인들이 교육 받을 권리를 강조했다. 이 사건으로 임부득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검거됐지만 유일하게 기소돼 1년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1년 만기 출소했지만 1934년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또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전주형무소 행장(교도소 기록)에는 임부득의 여성해방운동가로서의 면모도 드러나 있다. 임부득은 상담에서 “우리 여성이 경제적으로 해방된다면 정치적 해방도 얻을 수 있다”면서 “우리 여성은 빨리 인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임부득의 오빠 임휘영(1908~1972)과 남편 김철주(1908~1977)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임휘영은 1926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인은 불결한 저질민족’ 등 민족차별적 언행을 일삼은 일본인 교장에 반발해 항일 동맹휴학에 참여하고, 교장을 학교 밖으로 쫓아낸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임휘영과 함께 동맹휴학에 참여했던 김철주는 3년 뒤 임부득과 혼인했고, 아내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살았다. 김철주는 1945년 작성된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의 전주경찰서 요시찰 대상에도 포함돼 있다.
1920~1930년대 치열하게 항일운동에 헌신한 두 사람은 해방 후 조용한 삶을 살았다. 임부득 김철주 부부의 손자 김모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조부모님께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사실이 알려지면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알리지 않고 사셨다”면서 “할머니는 1987년 광복절 다음날인 8월 16일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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