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군지장(敗軍之將) 망국지민(亡國之民)으로 이미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지 오랜 저는 십 년간을 정처 없이 방랑하여 뱁새같이 잠자고 두더지같이 마시면서 구차히 쇠잔한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붓을 내던지고 몇몇 열사와 함께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써 적과 싸우기를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어느덧 천한 나이 사십이 지났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사진)가 1922년 가을 중국 공산당 창당 멤버 중 한 명인 리다자오(李大釗·1889∼1927)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편지는 당시 중국 베이징에 머물던 단재의 궁핍과 민족운동의 좌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단재는 ‘시경(詩經)’의 시(수리도 솔개도 아닌데 어찌 하늘에 날아오르고/잉어도 다랑어도 아닌데 어찌 연못에 들어가 숨겠는가)를 인용하며 “하염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고 했다.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 100주년을 맞아 학계에서 선언의 배경과 의의가 재조명되고 있다. 선언은 일본의 ‘강도정치’가 ‘2000만 조선 민중’의 생존권과 자유를 유린·말살해 왔고, ‘민족 생존’을 유지하려면 “혁명 수단으로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월간순국’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선언을 쓸 당시 단재의 고뇌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분석했다. 도 교수에 따르면 단재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류자명을 통해 중국의 아나키스트를 만났고, 루쉰 등 중국의 혁명적 지성인들도 접하게 됐다. 편지는 그때 만난 리다자오에게 썼지만 실제 보내지지는 않았다.
단재는 무장 전투가 자신과 같은 글쟁이(유생·儒生)에게 맞는 일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1922년 지은 시 ‘가을밤 회포를 적음’에서는 “무디어진 붓을 들고 청구(靑丘) 역사 끄적이네”라며 ‘검’을 버리고 ‘붓’으로 돌아온 회한을 노래했다. 도 교수는 “단재는 늘 ‘붓’과 ‘검’ 사이에서 갈등했고, 검이든 붓이든 투쟁을 찬양했다”고 설명했다.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1898∼1959)이 단재를 찾아온 건 단재가 이 같은 글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12월이다. 김원봉은 실의에 빠졌던 단재를 찾아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고, 마음을 다잡아 글을 쓴 단재는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1923년 1월 28일 발표했다.
김기승 순천향대 국제문화학과 명예교수는 ‘월간순국’에 기고한 글에서 “신채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의열 투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면서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폭력적 실천으로 스스로 각성되는 민중혁명의 주체로 선언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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