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남부에 있는 멜버른은 시드니에 이어 2번째 큰 도시다. 지구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80~90층짜리 마천루 빌딩이 몰려 있는 도심 뿐 아니라 야생의 자연과 스펙터클한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지구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호주에는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동물이 야생에서 뛰어논다. 호주의 동물들은 대부분 순한 초식동물들로, 주머니에 새끼를 넣어서 기르는 유대류다. 반면 육식을 하는 대형 맹수는 찾기 어렵다.
멜버른 남동쪽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필립 아일랜드’는 야생의 자연이 잘 보전된 섬이다. 이 곳엔 펭귄과 캥거루, 코알라, 왈라비, 흑조, 가시두더쥐 등 희귀한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펭귄이다. 남극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펭귄이 왜 호주 멜버른 바닷가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필립 섬에서 만난 펭귄
필립섬에 가면 밤마다 요정들이 뛰어다닌다. 어른 팔뚝만한 30cm 정도의 키에 몸무게도 1kg 남짓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펭귄이다. 학명은 ‘쇠푸른펭귄’인지만 ‘리틀 펭귄’이라고 부른다. ‘요정 펭귄’ ‘페어리 펭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귀여움의 극치다.
남극 대륙에 살고 있는 황제펭귄은 평균 1m22cm 키에 몸무게도 20~40kg나 나가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작다. 일반적으로 큰 펭귄은 추운 곳에 서식하고, 작은 펭귄은 따뜻한 곳에 산다고 한다. 덩치가 작은 멜버른의 펭귄은 남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호주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펭귄이 호주에 살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대륙 이동설이다. 호주대륙은 원래 남극대륙과 남아메리카 대륙과 붙어 있다가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호주 남부 멜버른, 태즈매니아 섬이나 남미 칠레, 아르헨티나 남부에도 펭귄이 살고 있는 것이다. 호주 남부에 있는 멜버른 앞바다는 남극해라고 불린다. 물이 차가워 여름에도 해수욕을 하기 힘들다. 대신 파도가 거세 매년 세계적인 립컬(Rip Curl) 서핑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어제 귀가한 펭귄 수 : 2222마리’
기자가 지난달 필립섬 펭귄 퍼레이드 센터에 찾아갔을 때 입구에 쓰여져 있던 숫자다. 아침에 바다로 나간 펭귄 떼들은 2박3일 간 바다에서 먹이 사냥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 해안가로 돌아와 집을 찾아간다. 필립섬 서머랜드 비치에 해질녘에 찾아가면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온 섬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장관을 이루는 ‘펭귄 퍼레이드’다.
펭귄퍼레이드 센터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로비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 캥거루보다 약간 작은 유대류 동물인 왈라비가 뛰어다니는 모습도 신기하다. 오후 8시반 쯤. 해가 지기 시작해 바다로 나갔다. 벌써 해안가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펭귄이 나오는 길목을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다.
리틀 펭귄이 해가 진 후 바다에서 나오는 이유는 천적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펭귄은 육지 위 풀숲에 땅을 파고 굴 모양의 집을 짓고 사는데, 뒤뚱거리며 바다까지 가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붉은 여우나 야생고양이 같은 천적 포식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펭귄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뜨기 전에 바다에 나갔다가, 다시 어두워졌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해가 지자 갑자기 바닷물 속에서 리더 펭귄 한 마리가 고개를 쑥 내밀고 해안 주변 동태를 살핀다.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는지 그를 따르는 수십마리의 펭귄들도 따라 올라온다. 뭍에 오른 펭귄들은 바위 위에서 수십마리씩 떼를 지어서 한참 동안 서 있다. 날개를 쫙 펴서 털을 말리는 놈도 있고, 주변을 둘러보며 떠들어대는 놈도 있다. 부부인 듯한 커플 펭귄은 목주변의 가려운 곳을 서로 부리로 긁어주고 있다. 자기 부리로 자기 목의 가려운 곳을 긁기는 힘들 것이다. 사랑하는 커플끼리 서로의 목주변을 긁어주는 것이다.
몸이 어느 정도 마르고 나면 적게는 5마리, 많게는 20여 마리의 펭귄이 무리를 지어 집을 찾아간다.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그런데 무리에 따라서 사는 곳이 다르다. 바닷가 근처에 굴을 파고 사는 녀석들은 여유를 부린다. 그런데 높은 산 위로 고갯길을 넘어서 힘겹게 올라가는 놈들도 있다. 또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산비탈을 넘공, 풀밭을 건너 멀게는 2km나 걸어서 가는 녀석들도 있다고 한다.
젊은 펭귄 무리들은 채널A ‘강철부대’의 부대원들이 행군하듯 날씬한 몸으로 펄쩍 펄쩍 용수철처럼 뛰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배가 불룩한 펭귄들은 술에 취한 듯 힘겨운 갈짓자 걸음을 한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물고기를 뱃 속에 가득 담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저러다 넘어지고 말지! 하는 순간. 비탈길을 오르던 펭귄이 배를 깔고 그대로 주저 앉는다. 통통한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 소파나 물침대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한참이나 엎어져서 가지 않으면, 옆에 있는 동료 펭귄이 흔들어 깨운다. ‘야, 집에 가자!’ 그러면 다시 일어나 뒤뚱뒤뚱 걷는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 엄마, 아빠의 퇴근길이 떠올라 울컥한 장면. 밤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이 서로 부르는 소리에 고요하던 필립 섬은 펭귄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어릴 적 동네 골목길에서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놀 때, 엄마가 대문을 열고 ‘저녁밥 먹어야지’라며 나를 부르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까이에서 본 펭귄은 발가락에 물갈퀴가 보였다. 날개는 지느러미처럼 작았다. 부리는 새부리처럼 날카롭고 끝이 아래로 휘어져 있다. 동그란 눈은 귀엽기만 하다. 땅 위에서는 느린 리틀 펭귄이지만 바닷속에서는 최대 초속 1.7m(시속 6.4km)로 헤엄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재빠른 수영실력을 자랑한다. 또한 위성추적장치를 달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리틀 펭귄은 하루 평균 15~50km를 헤엄치며, 평균 200~1300번을 잠수해 10~30m 깊이에서 멸치나 오징어 등을 잡아 먹는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필립 섬에 정착하기 전에는 이곳에 10개나 되는 리틀 펭귄 군락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로와 건물이 생기고, 사람들을 따라 야생고양이나 여우 등이 들어오면서 9개 군락지가 살아지고, 서머랜드 만에 하나의 군락지만 남게 됐다.
이에 1985년 빅토리아주 정부에서는 리틀 펭귄을 보호하기 위한 30년 계획을 세우고, 서머랜드 만의 집과 땅을 모두 다시 사들여 펭귄 서식지를 만들었다. 이같은 노력으로 필립섬에 2007년 2만6000마리였던 펭귄이 현재 3만2000마리로 늘어났다고 한다.
●‘흑조’의 호수
필립아일랜드에는 코알라 보호센터도 있다. 그런데 교통체증 때문에 시간이 늦어서 코알라를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멜버른 현지 가이드인 대니얼 서 씨는 대신 “현지인들만 알고 있는 힐링장소인 백조의 호수(Swan Lake)를 소개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유칼립투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지나자 한적한 호수가 나타났다. 호숫가 풀밭에서는 왈라비가 조용히 풀을 뜯고 있다가, 사람이 다가서면 깡충깡충 뛰어 달아났다. 왈라비는 캥거루와 비슷하게 생긴 유대류인데, 몸집이 좀 작고 털색깔이 짙다.
호수 위에는 수많은 새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아한 모습의 커다란 새가 눈에 들어왔다. S자로 굽은 긴 목을 물에 담갔다가 빼는 실루엣이 영락없는 백조였다. 그런데 몸이 흰색이 아니라 검은색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블랙 스완(Black Swan)’, 흑조였다. 세상에 흑조가 진짜 있다니! 놀라웠다. 흑조는 온 몸에서 부리만 빨간색이었다.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3막에는 백조 오데트로 변장한 흑조 오딜이 지그프리트 왕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어했던 1인2역 변신 장면이다. 블랙 스완은 동화나 영화에서 흑화한 주인공에 대한 상징적 은유인줄 알았는데, 멜버른의 호숫가에서 진짜 흑조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경제용어로 ‘블랙 스완’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전 세계의 경제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위기를 맞을 때 사용하는 용어다. 흑조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특산종이라고 한다. 서구 유럽인들이 호주에서 백조와 똑같은 흑조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가 가는 용어다.
스완 레이크에는 조그만 통나무 집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눈높이에 일자로 뚫린 창문으로 호수 위에 떠다니는 새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새들이 바로 앞까지 헤엄쳐 다가오기 때문에 망원경도 필요없다. 눈 앞에서 이렇게 평화롭고 고요한 대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침묵 속에 경탄하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며칠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힐링의 호숫가였다.
호숫가에서 돌아오는 데 길섶에 등에 뾰족한 바늘이 촘촘히 박힌 생물체가 땅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처음엔 고슴도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동물은 다음날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해변 풀숲에서 또다시 만났다. 이번엔 얼굴을 들고 네발로 어기적 어기적 걸었는데, 길쭉한 주둥이가 있어 고슴도치와 달랐다. 찾아보니 ‘가시 두더지’ 또는 ‘바늘 두더지’라고 불리는 놈이었다.
개미핥기처럼 길쭉한 주둥이로 개미나 벌레, 곤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호주의 특산종인 ‘오리 너구리’처럼 가시 두더지는 포유류인데 알을 낳는 특이한 동물이었다. 알에서 태어난 새끼를 배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키우는 유대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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