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이비 종교에 빠질까…“내가 메시아” 위험한 가스라이팅[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6일 10시 00분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상 속 심리적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다면 이메일(best@donga.com)이나 댓글로 알려주세요. 기사로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상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주변과 고립시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 뒤 심리적 조종을 시도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이비 교주들은 상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주변과 고립시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 뒤 심리적 조종을 시도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는 1938년 영국 극작가 패트릭 해밀턴이 쓴 ‘가스등(Gaslight)’이라는 희곡에서 유래됐다. 아내 벨라는 남편 잭이 외출할 때마다 이상하게 집 조명이 어두워진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가스 연료를 아파트 건물 모두가 나눠 써야해 가스등을 켠 집이 많아질수록 빛이 어두워졌다. 당황한 잭은 “당신이 헛 것을 본 것”이라며 아내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몰아갔다. 사실 잭은 살인범이자 절도범이었고, 비어 있는 윗집에 보석을 훔치러 가서 가스등을 켤 때마다 벨라가 조명이 침침해 지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잭은 지속해서 아내에게 “정신병이 있었던 당신 어머니처럼 되는 것 아니냐”고 세뇌했고, 벨라는 스스로도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1944년 영화 ‘가스등(Gaslight)’의 공식 포스터. 동아일보 DB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1944년 영화 ‘가스등(Gaslight)’의 공식 포스터. 동아일보 DB


가스라이팅은 타인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비종교 단체는 가스라이팅의 특징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이다. 교리를 세뇌하는 것은 물론 가스라이터(교주)가 바라는 대로 신도들이 열심을 다하도록 만든다. 사이비 교주는 피해자가 △완전히 주체성을 잃을 때까지 서서히 심리적 통제 강도를 높이고 △종교 단체에만 의지하게 하며 △가족 등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킨다. 다른 신도들이 집단으로 가스라이팅에 동조하기 때문에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 등 개인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스라이팅보다 훨씬 강력하게 발생한다.

가스라이팅의 3단계
로빈 스턴 미국 예일대 의과대학 부속 예일감성지능센터 부소장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3단계로 진행된다. 그는 2006년 저서 ‘가스라이트 효과’를 통해 희곡 제목에서 유래된 가스라이팅의 의미를 처음 정립하고 사회에 알린 역할을 했다.

1단계는 ‘불신’으로 피해자는 가스라이터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혼란과 괴로움을 느낀다. 2단계는 ‘자기 방어’다. 온종일 상대방이 한 말을 되새기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한다. 상대방의 말이 정말 맞을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증폭되면서 괴로움과 절망감을 크게 느낀다. 3단계에 이르면 피해자는 가스라이터와 좋은 관계로 지내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상태에 이른다. 상대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사이비종교 단체는 새로운 신도가 들어오면 집단으로 가스라이팅에 나선다. 교주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시작이다. 피해자가 혼란스러워하면 “우리 교단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상을 제시하며 안심시킨다. 어느 정도 넘어온 것 같으면 거액의 헌금을 요구하고, 성적으로 착취하며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를 가족, 친구 등 외부 세계와 철저히 고립시키면서 종교 단체에 더 의존하게 만든다. 본격적인 세뇌, 조작, 통제가 시작되면 의사결정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는다.
●사이비 단체의 특징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다.
·질문을 하거나 교주의 권위를 의심해선 안 된다.
·부모와 자녀 등 가족 관계를 방해하고 훼손한다.
·거액 혹은 일정액을 기부할 것을 강요한다.
·외부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신적, 신체적 다양한 처벌이 있다.
·교단 지도부가 미성년자를 비롯한 다른 신도들을 성적으로 착취한다.
·지정된 건물이나 수용소를 벗어나면 미행 당하거나 보호자를 동반해야 한다.
·교단을 떠나면 스토킹이나 괴롭힘을 당한다.

주: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 ‘가스라이팅’에서 발췌

사이비 교주의 마력(魔力)?… “성격 장애일 가능성”
가스라이터에 대한 정확한 진단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이들이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5)에서 분류하는 성격 장애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자기애성 성격 장애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거침없이 행동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리더십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이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들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굉장히 과도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 제멋대로 통제하려고 한다. 성도착증이나 섹스 중독, 반사회적 비행 등이 빈번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감정 기복이 심한 경계성 성격 장애일 경우에는 피해자에게 책임과 죄책감을 갖게 만들어서 자기 멋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성향도 가스라이터의 특징과 관련 있다.

‘가스라이팅’의 저자이자 미국의 임상심리 전문가인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는 “가스라이터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을 확보하고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며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남을 조종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어린 시절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서 가스라이팅 행동을 습득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가스라이터의 표적이 되는 ‘에코이스트’
자기애가 넘치고 지배욕이 강한 가스라이터와 정 반대 성향인 ‘에코이스트(Echoist)’는 희생양이 되기 쉽다. 에코이스트는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 소속 임상심리학자 크레이그 맬킨 박사가 2016년 저서 ‘나르시시즘 다시 생각하기’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에코는 헤라에게 저주받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끝만 메아리처럼 따라 하게 되는 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벌을 받은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짝사랑했지만 고백 한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고, 그를 그리워하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만 남긴 채 죽고 만다.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키소스’(1903). 말을 하지 못하는 에코는 물속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져있는 나르키소스를 지켜보기만 한다. 영국 워커 아트 갤러리


에코이스트는 자기 주장을 펴지 못하고 남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주요 특성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고 △관심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내 탓을 하는 습관이 있고 △자신보다 타인의 욕구를 먼저 채워주고 △뭘 원하는지 표현하기 어려워하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갈등 관계를 피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자신감 없고 자기 탓을 하는 성향 때문에 가스라이터의 표적이 되기 쉽다. 유년기 트라우마가 있거나 애정 결핍 등 정서적 공허함이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가스라이팅 체크리스트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자신에게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고 묻는다.
·직장에서 혼란스럽고 얼빠진 느낌이 자주 든다.
·특정인(부모, 연인, 상사, 친구)에게 자주 사과를 한다.
·상대가 윽박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간단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상대를 만나기 전에 잘못한 일이 없는지 곱씹는다.
·예전의 나는 더 자신감 있고, 재미있게 살았다.
·인생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잘 지내던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 잦다.

주: 로빈 스턴 ‘가스라이트 효과(The Gaslight Effect)’에서 발췌

‘교주=신’…권위에 대한 절대 복종
교주를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면 부도덕한 지시를 할지라도 쉽게 따르게 된다. 심리학에서 유명한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얼마나 인간이 권위에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1961년 실시된 이 실험은 많은 윤리적 논쟁과 연출 논란이 뒤따랐지만 여전히 시사점이 크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소재로 한 영화 ‘밀그램 프로젝트’에서 교사 역을 맡은 실험 참가자가 전기 충격 버튼을 누르기 전에 전전긍긍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밀그램 프로젝트’ 공식 홍보 사진


밀그램은 학습과 관련한 연구를 한다고 포장해 실험 참가자 40명을 모집했다. 실험 참가자는 교사 역할을 맡아 학생이 문제를 틀리면 전기 충격 장치를 누르도록 했다. 전압의 최저는 15볼트, 최대는 450볼트였다. 실험 참가자들이 학생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머뭇거릴 때마다 연구자들은 “계속 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실험을 지속하십시오”라고 반복해서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전기 충격 장치는 가짜였고, 학생들은 연기를 했다. 실험 전 밀그램은 실험 참가자의 극소수만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65%가 최대치까지 전압을 올렸다. 심지어 죽은 척하는 학생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자신을 신격화한 사이비 종교단체 교주들은 자기 말이 곧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신도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게 만든다.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홍보영상 캡처


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자의 작은 권위에도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데, 자신이 신이라고 믿는 대상에게는 어떻게 행동할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서는 신도들이 말도 안 되는 교주의 명령에 따르는 모습이 수도 없이 나온다. 구원을 받기 위해 교주와 강제 성관계를 갖고, 재산이나 가족 관계를 전부 교주 마음대로 하도록 복종한다. ‘교주=신’ 공식이 일단 성립되면 엄청난 권위에 눌려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빠른 ‘손절’만이 정답
전문가들은 가스라이터와 최대한 빨리 관계를 끊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 박사는 “고도로 숙련된 심리치료사들조차도 (가스라이터의) 성격 장애를 치료하기란 쉽지 않다”며 “그들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주변에 사이비종교에 빠진 이가 있다면 교주의 불법 행적에 관한 기사나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이비종교 단체뿐 아니라 가스라이팅은 가족, 연인, 직장 상사나 동료, 친구 관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부모나 배우자일 경우 사실 무조건적 ‘손절’은 쉽지 않은 문제다. 로빈 스턴 박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가장 친한 친구와 절교하거나 이상적인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며 “실제로 상대방과 헤어질 필요는 없지만 헤어질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전개될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무엇보다 나는 이미 유능하며,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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