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흐드러진 봄날 휴식을 위해 경남 통영을 찾은 37년 차 소설가 이로. 그에게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찾아온다. 커피와 셔벗의 맛에 빠져 통영 한 카페의 단골이 된 그는 그곳에서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카페 주인 희린을 알게 된다.
희린은 20대에 대공 보안 분실에 끌려간 뒤 평생 왼팔을 쓸 수 없게 됐고, 젊은 시절 그가 동시에 사랑했던 두 사람을 잃었다. 한 명은 주사파였던 첫사랑 은후다. 그는 종적을 감춘 지 7년 만에 나타나 희린의 마음을 휘젓지만 결국 경찰에 쫓겨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또 다른 한 명은 대공 보안 분실에서 처음 본 희린을 지키려고 고문 실태를 폭로한 뒤 경찰복을 벗은 상헌이다. 상헌은 은후와 재회한 뒤 갈등하는 희린을 놓아주기 위해 말없이 그녀를 떠난다. 희린은 그런 상헌을 찾지 않은 채 그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키운다.
많은 청춘이 스러져간 1980년대 어딘가에 실제 있었을 법한 사랑 이야기를 참신한 형식으로 담아냈다. 소설가 이로의 일상과 이로가 자신의 일상을 형에게 전하는 편지, 그리고 희린의 회고록까지, 총 3가지 형식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각각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소설은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된다.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아름다운 통영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 위로 벚꽃 잎 흩날리는 풍경과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아 내리는 커피, 산양유로 만든 셔벗 등 다양한 음식 묘사는 읽는 맛을 더한다. 통영 중앙시장 상인들의 모습과 바닷마을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희린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오가다 보면 복잡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가까스로 극복한 한 여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바다 위를 나는 저 갈매기가 없다면 과연 시간은 흐를까. 바람과 저 낙화가 없다면. 나는 그것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산다. 흘러가 줘서 고맙다.”(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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