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는 백년사진 11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고른 사진은 “공부 잘했던 학생들 얼굴”입니다. 서울시내 유명 고등학교(배제보통, 진명여고)와 전문학교(경성의전, 세브란스) 졸업식에서 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에 대한 기사입니다. 1923년 3월 23일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지금과 달리 100년 전에는 졸업식이 3월 말, 입학식은 4월 초였습니다.
▶먼저 제일 오른쪽 위에 있는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 최대한 원문 그대로를 옮겼는데 영 어색한 부분은 지금의 구어체로 바꿨습니다.
<영광을 식하는 졸업장 -다정한 학창을 뒤로 두고 사회로 나오는 새 사람들 - 어제 거행한 4개 학교 졸업식>
시내 정동에 있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는 그제(재작일) 오후 2시부터 배재학당의 졸업식까지 겸하여 성대한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순서를 따라 여러가지 절차를 지내고 그 학교 교장 ‘아펜젤러’씨의 뜻깊은 훈사를 비롯하여 감독관의 고사와 내빈 측 축사를 마친 뒤에 졸업생 대표의 답사 등이 있었는데 금년도 졸업생은 고등보통학교에 44명과 배재학당의 7명을 합하여 모두 51명인데 우등생은 다음과 갔다더라. ▲고등보통 李時雄 ▲배재학당 金賢植 ▲배재우승생 리시웅군(좌편). 전현식 군(우편)
▶ 이어서 두 번째 줄 왼쪽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대학로에 있던 경성의대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의대 졸업식 기사입니다.
<경성의전의 졸업 우등생은 세명>
시내 연건동에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는 그제 오후 2시부터 그 학교 안에서 제 7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지하교장(志賀校長)의 정중한 훈시와 내빈의 간곡한 축사로 순서를 따라 성대한 가운데 식을 마쳤는데 금년도 졸업생은 본과 34명과 구본과 23명을 합하여 모두 57명이라는데 우등생은 아래와 같다더라. ▲白道爕 ▲平良文雄, 武藤忠次 ◇의학전문 우등생- 우편으로부터 무등충차량, 백도섭군, 평량문웅군
▶맨 아래쪽 사진은 진명여자고등학교 졸업식 소식입니다.
<진면교문의 환희 - 부속보통교와 여학원의 졸업식까지 거행>
시내 창성동에 있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그저께 오후 2시부터 그 학교 안에서 부속 보통학교와 경성여자학원의 졸업식까지 겹쳐서 거행하였는데 식장의 기분이 일종 가벼웁고도 침잠한 가운데서 순서를 따라 여러 가지 절차를 지낸 뒤에 교장 엄준원 씨의 고사와 총독대리로 대내(大內)씨와 도지사 대리로 좌등(佐藤) 양 씨의 훈사와 내빈의 축사를 마친 후 장차 가정으로 학교로 실 사회로 닦은 지식을 시험하러 나가는 졸업생의 답사가 있었는데 스승의 은혜를 기리며 새로운 희망을 살외는 뜻은 실로 일동에게 기쁘고도 애처로운 감상을 주었으며 마지막으로 청아한 졸업가로써 마치었는데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은 모두 열한 명이며 경성학원은 2명이라는데 우등생은 아래와 같다더라. ▲吉奉順 ▲方正先▲朴英熙 ▲朴俊植 ▲方点順 ◇진명의 우등생 - 우편으로부터 김봉순양, 방한선양, 박연희양, 박우식양, 방적순양
▶ 맨 아래 쪽은 학사모를 쓰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새로 의사가 되었다는 졸업생들 이야기입니다.
<신의사가 5명 - 승격 후 제 1회로 세브란스 졸업식>
시내 남대문 밖에 있는 ‘세부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는 재작일 오후 3시 반부터 남대문예배당 안에서 승격된 이후로 제 1회의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학교 교장 ‘어비신’씨 이하 교원 일동과 다수한 내빈이 모여 매우 성대하였다는데 이번 졸업생은 다음과 같다더라. 우편으로부터 오한영군, 김나흥군, 송태근군, 박선이군, 조인모군.
▶ 지금의 신문에서도 여러 명의 얼굴이 등장할 때, 왼쪽부터 누구누구 오른쪽부터 누구누구 하듯이 ‘우편으로부터’라고 써서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맞추어놨습니다. 사진 하나하나마다 해당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입해서 헷갈리지 않도록 해놓았습니다. 나머지는 다 한자로 병기되어 있는데 연세대 세브란스 졸업생들의 경우는 한자 없이 한글만 써 있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진명여고의 우등 졸업생의 경우 한자 이름과 한글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뭔가 표기법의 차이인지 아니면 편집자가 잘못된 한자를 쓴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제가 해결할 수도 없는 과제라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내가 사는 동네 사람 말고 저 멀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을 우리 민족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효도의 방법이고 성공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유교 문화권이 대부분 그럴 겁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업적을 이뤄 널리 이름을 떨친다는 의미일 텐데 옛날에는 이름을 알리는 것만 가능했지만, 신문이 생기고 사진이 등장하면서 얼굴도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문에 졸업 우등생의 얼굴이 게재된 것도 그런 의미일겁니다. 옛날로 따지면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저 학생들의 사진은 어디서 난 것일까요? 먹고 살기 힘든 시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집안이 부유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각자 사진을 찍어 갖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이야 사진이 흔하고 18세 고3정도 되는 학생 개인의 사진이 수천, 수만 장 있을 테지만 예전에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이라 사치의 영역이었습니다. 누가 찍었을까요? 저 사진들은 신문사 사람들이 가서 찍은걸까요? 아니면 학교측에서 제공한 사진이었을까요?
상태가 균일한 걸로 봐선 신문사에서 직접 가서 찍었을 거 같습니다. 제공사진이라고 하기에는 품질이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 뉴욕타임즈의 100년 전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창간 100주년을 맞아 독자들에게 100년 전 사진을 판매한다는 광고였습니다. 서부 개척시대의 결기 넘치던 미국 초창기의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인디언 추장이 말을 타고 가다 카메라맨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100년 전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같은 방식으로 촬영되고 현상되고 인화되어 인쇄되지만 카메라 앞의 피사체의 모습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 조선, 우리 사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거나 남기고 싶었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람’ 그 자체 아니었을까요?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 세상을 구하고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갈 인재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한정된 지면에 고등학교와 초급대학 우수졸업생의 모습을 기록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고 보니 2000년대 초반까지 학력고사 전국 1등을 인문계, 자연계, 남학생, 여학생 이렇게 나눠서 신문에 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관학교 수석 합격자들 사진도 있었구요. 하지만 요즈음에는 수석 합격자의 얼굴을 신문에 쓰는 관행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입시 공부가 전부가 아니고, 다양한 성공의 방식이 있다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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