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치하 독일인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31일 0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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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이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펴낸 책 ‘감정의 역사’(푸른역사)
김학이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펴낸 책 ‘감정의 역사’(푸른역사)
현대 사회에서 행복은 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로 여겨지지만 과거에는 공적인 활동을 통해 느끼는 감정을 가리켰다. 분노는 오래 전에는 신의 감정으로 여겨졌고, 개인이 표출하는 분노는 광기로 간주됐다고 한다.

무서움, 고독, 행복 등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기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떨 때 행복을 느끼고 슬픔을 표현해 왔을까. 각 시대를 대표하는 감정은 무엇이고, 시대에 따라 감정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져왔을까. 감정사는 이 같은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다.

나치즘 연구에 몰두해온 김학이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펴낸 책 ‘감정의 역사’(푸른역사) 16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약 500년간 독일 사회를 대표해온 감정의 역사를 파헤쳤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파라켈수스(1493~1541)가 16세기 남긴 논고와 편지부터 19세기 기업가 베르너 폰 지멘스(1816~1892)의 회고록, 20세기 학자들의 나치즘 연구까지 방대한 자료를 넘나든다.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경건주의의 운동을 전개한 뷔르템베르크 경건파의 모습. 프랑크프루트의 목사 필립 슈페너는 교회 개혁을 호소한 책 ‘경건한 열망’에서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며 자신을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푸른역사 제공


근대 독일 사회를 관통하는 감정은 공포였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1529년 작성한 ‘소교리 문답’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내용이 반복된다. 당시 나온 예언서나 점성술에는 공통적으로 재앙과 종말론이 담겼다. 공포가 당시 종교와 결합해 개인의 내밀한 감정의 표출을 억제하는 도덕적 장치로 작동한 것이다. 저자는 이같은 분석을 통해 “16~18세기 감정은 종교 및 도덕적 규율 장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 전쟁의 시대였던 17세기부터는 ‘감정 레짐(규범 틀)’의 변화가 포착된다. 이 시기 한 궁정인의 일기에는 이전 시대에서 볼 수 없던 슬픔, 사랑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19, 20세기에는 신뢰, 충성, 기쁨 등 감정이 노동의 동기를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생산자원이 됐다. 이 시기 감정은 ‘노동의 기쁨’으로 축약된다. 저자가 살펴본 지멘스의 회고록에서 ‘인간이 기획하고, 행동하고, 성과로 얻는 행위’인 노동은 기쁨과 결부됐다. 이 개념은 저자의 주 전공인 나치즘과도 연결된다. 1933년 집권한 나치는 노동조합을 없앤 뒤 ‘노동전선’을 조직하고 그 산하에 ‘기쁨의 힘’이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와 함께 신뢰, 충성, 명예 등 감정을 핵심 기제로 하는 노동법을 제정했다. 저자는 “나치의 노동법은 감정법이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1930년대 나치 치하 독일에서 만들어진 국영 레저 단체 ‘기쁨을 통한 힘’의 크루즈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즐기는 탑승객들. 나치는 집권 후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여행과 문화 프로그램을 저렴하게 제공하며 노동과 기쁨을 결부시켰다. 푸른역사 제공


나치 치하 독일 일반인들의 감정은 어땠을까. 저자는 ‘차분한 열광’이었다고 분석한다. 1938년 독일 국민의 3분의 2가 한 개 이상의 나치 기구에 속했다. 1940년 독일 베스트셀러 작가 하인리히 슈푀를이 출간해 선풍적 인기를 끈 소설 ‘가스검침관’에서 당시 독일인의 진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은 겉으로 나치 독재에 동조하지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차분함을 유지한다. 차분함의 근저에는 국가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인의 차분함과 공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따스함과 진정성이라는 새로운 감정으로 이어진다.

감정의 역사를 짚다 보면 감정과 연결된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저자는 이를 “감정의 역사는 나의 감정을 상대화한다”고 표현했다. 분노와 혐오로 대표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감정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책을 읽으며 찬찬히 반추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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