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 수로왕과 허왕후의 러브스토리
한국관광 100選의 가야 스토리… 16세 공주 긴 항해 끝 김해 도착
허왕후, 속옷 산신령에게 바쳐… 분산성에서 만난 ‘왕후의 노을’
김해 최고의 명당지 수로왕비릉… ‘마음의 풍랑’ 잠재우는 파사석탑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던 남녀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았다. 미리 서로의 꿈에서 천상배필로 나타났던 솔메이트였다. 남자는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여자는 바다 저 멀리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다.
아유타국은 ‘아요디아(Ayodhya)’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현재 인도 북부 갠지스강 유역의 아요디아 혹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의 아요디아로 추정된다. 그러니 2000년 전 한반도 김해에 나타난 16세 공주 허황옥은 피부가 다소 까무잡잡한 남방 계열 미인으로 상상된다. 수로왕이 신하의 딸들을 왕비로 삼으라는 주위의 독촉을 7년이나 버티면서 기다려왔던 여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기록되는 두 사람의 만남은 시끌벅적했다. ‘삼국유사·가락국기’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다. 기원 후 48년 붉은색 돛을 단 화려한 배가 김해 앞바다에 나타난다. 어서 빨리 궁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수로왕의 마음과는 달리 공주 허황옥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육지에 상륙한 뒤 높은 언덕에 올라서더니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하는 수 없이 수로왕은 궐 바깥으로 나와 임시 행궁을 설치하고 왕비를 맞아들이는 혼례를 치렀다. 두 사람은 2박 3일간 궁궐 바깥에서 밀월을 나누었다. 고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이국적인 혼례 풍습이다.
이제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김해시 어방동의 가야테마파크는 신비로운 금관가야의 역사를 키워드로 삼아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선보이는 관광지다. 드라마 ‘김수로’의 세트장이었던 가야테마파크에 들어서면 6개의 황금알과 거북 조형물이 시선을 끈다. 가야 건국 설화에 따른 배치물이다. 설화는 가야 지역 9개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구지가를 부르니 하늘로부터 황금알 6개가 내려왔으며, 그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즉, 황금알 6개는 6가야를 의미하며, 수로왕은 6가야의 맹주라는 뜻이다.
거북 조형물은 난생(卵生) 설화의 배경인 구지봉의 정기를 받았다고 해서 ‘소원거북이’라는 명패를 달아 놓았다. 소원거북이 등 껍질에 올라 거북 머리를 꼭 안은 채 즐거워하는 어린이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김수로와 허황옥의 본격적인 러브스토리는 가야 왕궁의 중심 건물인 ‘태극전’에서 펼쳐진다. 2층 높이 웅장한 규모가 마치 진짜 가야 유적처럼 고풍스럽다. 실내로 들어서니 수로왕 탄생 신화를 생생히 느껴볼 수 있는 증강현실(AR) 체험과 함께 가야 철제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김해는 ‘쇠바다(金海)’로 불릴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인 ‘탄소 제련법’을 통해 고급 철기를 대량 생산해 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허황옥이 가야로 오기 전부터, 철제품 교역을 통해 국제적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한다.
태극전을 빠져나오면 가야시대 의복 등이 전시된 가락정전, 허황옥스토리관인 왕후전 등이 기다리고 있다. 허황옥스토리관에서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출발해 해풍과 별빛을 읽어가며 가야로 항해한 코스를 상징하듯, 어둠 속에 반짝이는 별빛으로 꾸며놓은 ‘거울의 방’이 눈길을 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사랑 이야기를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화려한 색채와 음악, 입체 영상으로 표현한 논버벌 퍼포먼스 ‘페인터즈 가야왕국’도 시간 맞춰 구경할 만하다. 해가 진 뒤에는 3D 미디어 쇼가 펼쳐진다. 이 밖에도 가야테마파크엔 가야 무사의 기상을 배우는 가야무사 어드벤처, 익사이팅 사이클과 익사이팅 타워 등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익사이팅 사이클은 높이 22m 와이어로프를 따라 자전거로 왕복 500m를 오가는 체험놀이인데, 아슬아슬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김해 만리장성에서 만난 왕후의 노을
인공미 짙은 가야문화 체험에 이어 실제 역사의 무대를 즐겨볼 차례다. 가야테마파크가 들어선 분성산(382m) 정상부에는 띠를 두르듯 돌을 쌓아 올린 분산성(사적 제66호)이 있다. 낙동강이 흘러가는 김해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허왕후가 고향 아유타국을 그리워하며 거닐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성벽이 유려한 곡선 모양으로 산을 휘감고 있어서 ‘김해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이곳은 노을 뷰가 아름답다. 최근에는 ‘왕후(허황옥)의 노을’이란 이름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김해시 생림면 낙동강철교 전망대의 ‘왕(김수로)의 노을’과도 남북으로 마주해 서로 짝을 이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분산성 안에는 ‘가야의 하늘길’이라고 불리는 산책 코스가 펼쳐진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곳저곳 아기자기한 역사 유적을 만나게 된다. 산 정상에 있는 해은사는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용왕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창건한 절이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왕전’이라는 전각도 있다. 대왕은 수로왕을 뜻하는데, 전각 내부에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이 외에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돌무덤인 고인돌, 분산성을 보수한 내력과 성을 지킨 업적 등을 새긴 4기의 비석을 보존한 충의각, ‘만장대(萬丈臺)’라는 흥선대원군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거대한 자연 암벽, 왜군의 침입을 연기로 알리던 봉수대 등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봉수대를 지키듯 웅장하게 서 있는 팽나무도 내력이 있다. ‘하늘은 만장대를 만들었고, 나는 천년수(千年樹)를 심노라’라는 각석(刻石)은 19세기 후반 정씨 성의 인물이 팽나무를 식재하면서 석벽에 호기롭게 새긴 글이다. 그렇다 보니 팽나무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소원수 역할도 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마음의 풍랑’을 진정시키는 파사석탑
수로왕과 허왕후의 러브 스토리는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능을 순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김수로왕이 영면한 수로왕릉은 김해시의 중심 서상동에 있다. 높이 5m의 원형 봉토 무덤인데, 납릉(納陵)이라고 불린다. 납릉 정문의 처마 밑 나무판에는 하얀색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는 그림(쌍어문 혹은 신어상)이 새겨져 있다. 쌍어문(雙魚紋)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또 다른 증거라고 한다.
수로왕릉 뒤편으로는 산책로가 있는데, 이곳에서 두 기의 고인돌을 만났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도 표시돼 있는 고인돌이다. 이 중 하트 모양으로 생긴 한 기의 고인돌은 사진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고인돌은 거의 대부분 좋은 기운이 서린 터에 조성돼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수로왕릉 일대가 명당임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김해에서 첫 번째로 꼽을 명당은 구산동의 수로왕비릉이다. 수로왕릉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언덕배기에 조성돼 있는데, 가야 건국 설화의 무대인 구지봉과 바로 인접한 곳이다. 허왕후가 잠든 왕비릉은 원래 수로왕이 영면(199년 사망)할 터였지만 왕비가 10년 먼저 세상을 떠나자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명당 터를 내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수로왕비릉 앞의 파사각에는 허황옥이 바다에서 두 달간 항해하면서 싣고 온 파사석탑이 있다. 험한 파도를 잠재워주었다는 영험한 석탑이다. 석탑의 돌을 분석해 보았더니 인도, 베트남, 일본 등지에서만 발견되는 암석이란 결과가 나왔다. 김수로와 허황옥의 국제적 러브 스토리가 상상이나 허구가 아님을 보여준다.
석탑은 돌덩어리를 여러 겹 쌓아놓은 듯한 형태인데,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래 탑을 깨 돌 조각을 가져가는 바람에 원래 모습에서 변형됐다고 한다. 석탑을 가만히 보노라니 걱정과 근심, 분노와 불안 등 세파에 시달리던 마음의 격정을 진정시키는 듯 부드러운 파동이 밀려오는 듯하다. 어쩌면 파사석탑이 ‘마음의 풍랑’까지 잠재우는 성석(聖石)일 수도 있겠다. 허왕후와 수로왕은 그렇게 가야인들의 마음을 달래주면서 140여 년간 가야왕국을 다스려 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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