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부모님과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시드니 북쪽 외곽의 작은 마을엔 동양인이 드물었다. 백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의 어설픈 영어를 비웃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자신감을 잃었다. 의견이 달라도 입에선 “예스” “오케이”라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의 입을 연 건 ‘토론’이었다. 아이는 쉬는 시간엔 조용했지만,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토론 땐 영어가 어눌하다고 비웃을 수도, 동양인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커서 세계 유명 토론대회를 휩쓴 ‘토론 전문가’가 됐다. 14일 인문교양서 ‘디베이터’(문학동네)를 펴낸 서보현 씨(29) 이야기다.
18일 화상회의 시스템 ‘줌’으로 만난 서 씨는 생각보다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을 끝까지 듣고, 오래 생각한 뒤, 천천히 생각을 털어놨다.
“제가 토론을 시작한 건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민자인 ‘아웃사이더’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말하기 위해선 토론장이 필요했습니다.”
호주에선 교내활동으로 토론을 장려한다. 그 역시 11세에 토론을 시작했다. 처음은 호기심으로 학교 토론팀에 가입했고 자신의 재능을 찾아냈다. 2013년 세계학생토론대회(WSDC), 2016년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에서 우승했다. 그는 호주 국가대표, 미국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로도 일했다. 토론 비결을 묻자 그는 ‘경청’을 언급했다.
“토론을 말을 잘해서 상대방 기를 누르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더 중요해요. 잘 들어야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있거든요. 토론은 웅변이 아닙니다.”
그는 신간에서 누구든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갈등을 회피하고 침묵하는 태도로는 현대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토론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역설한다.
“2019년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토론형 AI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세계 토론대회 최다 우승자와 토론을 벌였어요. AI가 논리적으론 우수했지만, 결과는 적절한 순간에 웃거나 인상을 쓰며 청중의 감정을 건드린 인간의 승리였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건 AI가 잘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걸 제일 잘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는 호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인문학부를 졸업했다. 현재도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당신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토론 전문가가 된 것 아니냐고, ‘침묵은 금’이라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갈등을 토론으로 풀지 못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토론은 서양 것이 아니에요. 어느 나라든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일은 있었으니까요. 특히 제 토론 스타일엔 ‘경청’이라는 한국 스타일이 짙게 묻어나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전 토론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치 진영 간의 공허한 말싸움, 우기기, 윽박지르기가 난무하기에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만의 온전한 생각을 드러내는 말하기 기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과 정반대의 의견을 명료하게 밝혀도 다툼이나 불화로 이어지지 않는 마법이 바로 토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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