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봐달라는 외침은 가혹한 말들에 파인 치유하기 힘든 상처탓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7일 03시 00분


[한시를 영화로 읊다]〈57〉자화자찬의 이면

영화 ‘피셔 킹’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패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나선 기사라고 여긴다. 트라이스타 픽처스 제공
영화 ‘피셔 킹’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패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나선 기사라고 여긴다. 트라이스타 픽처스 제공
테리 길리엄 감독의 ‘피셔 킹’(1993년)에서 패리(로빈 윌리엄스)는 충격적 사건을 겪은 후 자신이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나선 기사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동시대 인물인 이언진(1740∼1766)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뒤 과대망상에 가까운 자화자찬을 남긴 바 있다.


전통사회에선 자화자찬을 꺼렸기 때문에 자신의 초상화를 대상으로 한 시도 흔치 않다. 쓰더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데 그칠 따름이다. 하지만 시인은 당나라의 천재 시인 이백과 뛰어난 능력에도 권신(權臣)에게 미움을 사 여러 차례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이필, 그리고 전설상의 여덟 신선 중 한 사람인 이철괴를 호명하며 자신의 진면모가 이들을 합친 것과 같다고 큰소리친다. 심지어 다른 글에선 자신을 영원히 문형(文衡·대제학) 자리를 독점할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하기까지 했다(‘畫像自題’). 중인 신분의 역관(譯官)이었던 시인은 일본에까지 문명을 떨친 바 있지만, 정작 조선에선 인정해주는 이가 드물었다.

영화 속 패리의 과대망상은 인기 DJ인 잭이 라디오 방송 중 무심코 던진 말에서 비롯한다. 잭은 자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잃고 폐인이 된 패리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낀다. 박지원 역시 시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시인은 박지원의 안목을 믿고 자신의 글을 보내 평가를 부탁했지만 화려하고 세련됨만을 추구한 글이란 혹평을 받고 절망했다. 얼마 뒤 시인의 부고를 들은 박지원은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했다.

영화 속 잭이 죄책감으로 패리를 돕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박지원은 전기를 써서 요절한 시인을 추모했다(‘虞裳傳’). 시인의 전기에 수록된 시 중 한 수가 위 작품이다. 시는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글쓰기의 상례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시인은 그림에 표현된 자신의 외면보다 감추어진 내면의 가치를 봐달라고 외쳤다. 신분제의 질곡 속에서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자신을 알아달라는 절박한 인정 투쟁이었다. 박지원은 때를 잘못 만난 시인의 말에 슬픔이 많다고 평가했다.

불교에선 말을 잘못해서 짓는 업(業·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행위)을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영화 속 잭도, 박지원도 자신의 말 한마디가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의 죄’를 짓는가. 과장된 자화자찬의 이면에는 가혹한 말들로부터 받은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가 있다.

#자화자찬의 이면#나를 봐달라는 외침#피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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