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과 위로가 섞인 동기부여, 자기계발 강의로 유명한 스타강사 김미경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대표(58)에게도 20년 넘는 무명(無名) 시절이 있었습니다. 광고회사 직원, 피아노학원 원장을 거쳐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기업 강사’ 일을 시작한 그는 한참 동안 이름 없는 강사로 살았는데요. 모든 걸 다 이뤘을 것 같았던 ‘40대 김미경’이 실은 누구보다 가난하고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유독 고단한 40대를 보낸 그가 ‘성공 강박’ ‘완성 강박’에 갇힌 40대를 위로하는 책을 냈습니다. 올 2월 출간한 신작 ‘김미경의 마흔수업’입니다. 출간 2개월 만에 누적 판매 부수 15만 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김미경이 많은 세대 중에서도 40대를 위한 책을 쓴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또 그의 40대는 어땠는지도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김미경을 만났습니다. 40대를 위한 김미경의 조언(https://youtu.be/gI5Sfc9LQRg)과 2030세대를 위한 김미경의 고민상담(https://youtu.be/Bv6cLfuUytA)을 동아일보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40대는 어떠셨나요? “40대의 전 무명 강사였고 집 한 채 없이 가난했고 세 아이 돌보며 강의 다니느라 늘 시간에 허덕이던 사람이었어요. 쉬는 날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손에 쥔 건 없었어요. ‘아트 스피치’ ‘언니의 독설’ 같이 유명세를 가져다 준 저서는 모두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왔어요. 강의를 시작한 건 29살이었으니까 18년간 말 그대로 이름 없는 강사였어요.”
공자는 40세를 불혹(不惑)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일에 현혹되어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예로부터 40대는 20, 30대 노력했던 것을 보상 받고 완성하는 시기로 알려졌습니다.
―성과 없는 무명의 40대를 어떻게 버티신 건가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난 알잖아요. 노력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아줄 때까지의 시간과 내가 나를 알아주는 시간이 다른 것뿐이죠. 심지어 남들이 늦게 알아봐줄수록 좋아요. 실력이 아주 많이 쌓이거든요. 10년 노력한 것보다 18년 노력하니 실력이 훨씬 많이 쌓였던 거예요. 무명 시절을 노력하며 보냈기에 40대 후반에 이르러서 인지도가 생기고 유명해진 거죠. 누구에게나 무명의 시대는 있어야 해요. 겸허한 태도로 실력을 쌓을 기간이 필요하니까요.”
―정신적으로 힘들진 않으셨나요? “왜 안 힘들었겠어요.(웃음) 40대가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고3처럼 되는 거 아세요? 다 커버린 것 같고 다 산 것만 같아요. 고 1,2 때 치열하게 공부하다 고3이 되어 수능을 치고 나면 인생이 다 끝나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고3처럼 40대가 되면 20, 30대 노력한 인생의 성과가 나야 하는 느낌인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40대가 되면 연봉도 높고 집도 대출 없이 한 채는 가져야 하고 커리어 부문에서도 정점을 찍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50대 이후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것마냥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40대한테 50대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면 ‘거기 사람 사는 데예요?’ 이런 시선으로 봐요.(웃음) 40대가 지나면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게 절대 아니거든요. 절 보세요. 50대부터 유명해졌어요. 재산의 대부분을 50대에 벌었는걸요.”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직업적 성공을 거둔 그가 ‘동기부여 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건 29살 때였습니다. 그는 원래 음악도였습니다. 연세대 작곡과를 졸업했고 광고 회사에서 CM송 제작하는 일을 했으며 피아노학원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시절, 음악을 전공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엄마 덕분이에요. 읍내에서 작은 양장점을 손수 운영하셨는데 그 덕에 제가 시골에서 대학에 갈 수 있었어요. 우리 엄만 되게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자기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밀어줬어요. 같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더 노력하는 자식을 좋아했죠. 그래서 제가 음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그러셨어요. ‘내가 죽어라고 벌어서 학비 대줄게’라고. 대학 입학했을 때 엄마는 너무너무 기뻐하셨죠.”
―음대 졸업 후 어떤 일을 하셨나요? “대학 졸업 후 광고 회사에 들어가서 CM송 작곡하는 일을 맡았어요. 근데 일년 반도 못 다녔어요. 조직생활이 안 맞더라고요. 모두가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잖아요. 모두가 정해진 돈을 받는 것도 싫었고요. 왜 7시에 퇴근해야 하나? 난 12시까지 일하고 3배 벌고 싶은데 같은 생각을 했어요. 결국 회사 그만두고 집에 피아노 한 대 갖다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근데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아예 학원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처음 사업을 시작하신 거네요. “학원을 차리려면 돈이 필요할 거 아니에요. 처음엔 자본금이 없어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어요. 대출금이 많으니 잠이 안 오더라고요.(웃음) 대출은 많이 받았는데 원생들은 많이 없었으니까요.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새벽 4시 반이면 절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어차피 잠이 안 오니 학원에라도 가자는 마음으로 한동안 새벽 출근했어요. 우리 엄마 따라한 거였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새벽 기도를 다녔던 엄마가 그러셨거든요. ‘살다가 힘든 일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서 염원을 해’ 종교가 없는 저는 기도는 안 하고 아이들을 많이 오게 할 방법을 궁리하러 아침 일찍 학원에 나갔어요.”
―새벽 4시 반부터 피아노학원에 가서 뭘 하셨나요? “처음엔 새벽에 학원 나가서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걱정하는 데에만 시간을 쓰는 거예요. 걱정만 하면 해결은 하나도 안 되잖아요. 대신 염원하는 마음으로 엄마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아이들 사진을 하나하나 두고 ‘내가 당신의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피아노를 예쁘게 잘 치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편지로 써서 엄마들한테 보냈거든요. 편지에 감동한 엄마들이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1년 반 만에 학생이 200명으로 늘었죠.”
업계에는 소문이 쫙 났습니다. 28살 여성이 어떻게 학원 경영을 이렇게 잘하느냐는 거였죠. 어느 날 그는 피아노 학원 원장들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게 됩니다.
―‘강사 김미경’의 첫 데뷔였네요. “성공 사례를 발표해달라고 했는데 처음엔 당연히 안 한다고 했어요. 제가 강의를 해 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있는 이야기를 편하게 해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강의계획서를 만들었어요. 내가 왜 새벽 4시 반을 택했는지, 4시 반에 일어나서 5시간 동안 뭘 했는지, 편지를 쓰면서 뭘 느꼈는지, 학원에 안 오는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써내려갔죠.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웃음) 새로운 꿈이 생기더라고요. 강의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 새로운 꿈이 생긴 그는 ‘가르치는 걸로 먹고 사는 직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어떤 책에서 그는 ‘기업 강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은 동기부여 강사의 모태가 된 직업입니다.
―피아노 학원을 열심히, 또 잘 운영하셨기 때문에 강사가 될 수 있었던 거네요. “살면서 느낀 건데요, 일단 임계점을 넘겨야 해요. 뚜껑이 열릴 때까지 부글부글 끓어서 부풀어야 해요. 일단 뚜껑이 열린 후엔 3가지가 넘는 다른 기회로 연결돼요. 만약 제가 글을 쓴다고 생각해봐요. 글 분야에서 어느 정도까지 무르익으면 뚜껑이 열리겠죠? 그럼 예측하지 못했던 다른 분야의 운들과 연결이 되는 거죠. 근데 뚜껑이 열리지 않고 덮여 있잖아요? 그럼 아무 기회도, 가능성도 생기지 않아요.”
40대 후반 여러 베스트셀러를 쓰고 본인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진행했을 정도로 스타강사로 성공했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강의료가 주 수입원이었던 그에게 팬데믹 기간은 혹독했습니다. 오프라인 강의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한 달 강의료가 0원인 적도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 잘나가다 고꾸라진 거잖아요. 충격이 크셨을 것 같아요. “몇 개월간 통장에 0원이 찍히더라고요. 너무 놀라고 걱정되고 힘들었어요. 그때도 피아노 학원 차렸을 때랑 같았어요. 돈 버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돈을 버는 건 생각보다 쉬워요. 돈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펴보면 돼요. 사람보다 돈의 속도가 훨씬 빠르거든요. 팬데믹 3년 동안 빅테크 기업 주가가 확 올랐잖아요. 전 세계 돈이 그리로 모인 거죠. AI, 블록체인, NFT…. 모두 팬데믹 때 급격하게 성장했어요. 돈이 가리키는 방향이 디지털 분야인 거예요. 그러던 중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전환)’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박혔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팬데믹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카카오톡 외엔 사용할 수 있는 SNS가 없었다고 합니다.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한참 걸릴 정도로 그의 디지털 리터러시는 최하 수준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접한 후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실행력이 엄청나십니다. 젊은 사람들도 코딩은 배우기 어렵잖아요. “공부가 실행력 있을 게 뭐 있어요. 그냥 하면 돼요.(웃음) 관련 책을 사고 영상을 보는 거죠. 배운 지식을 제 일에 적용하기로 했어요. 오프라인에서 했던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온라인 교육 플랫폼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그가 고군분투한 내용은 2020년 7월 출간된 ‘김미경의 리부트: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이라는 책에 담겨 있습니다. ‘김미경의 리부트’는 영문판으로도 번역돼 미국 아마존 전자책 ‘전염병 분야’ ‘비즈니스 계획 및 전망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국내에서는 출간되자마자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휩쓸었습니다.
환갑을 앞둔 그는 5년 전부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어 공부입니다.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해외를 돌아다니며 살고 싶었던 그에게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미국 현지에서 ‘영어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55세부터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셨다니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매일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서 몇 시간씩 영어공부를 했어요. 그게 5년이 훌쩍 넘었죠. 언어 공부는 어릴 때 하라고 하지만 55살에 시작해도 가능하긴 하더라고요.(웃음) 3년 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유튜브 영상 조회수가 850만 회를 넘겼어요. 덩달아 자신감도 붙었죠.”
―‘총, 균, 쇠’의 저자인 세계적 석학 제레미 다이아몬드,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의 최연소 종신 교수 애덤 그랜트, 미국 출신 세계적 투자자 짐 로저스 등 해외 명사들과 대담 인터뷰도 하셨더라고요. “미국 현지 직강의 꿈을 위해 천천히 밟는 단계인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한다는 목표를 세웠죠. 처음엔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취소하고 싶은 유혹이 몰려왔어요. 인터뷰 전날엔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교수님 쓴 책을 몇 달에 걸쳐 원서로 다 읽었죠. 교수님 영상 스크립트도 뽑아서 외우다시피 했어요. 질문할 내용도 미리 다 외웠죠. 인터뷰 일주일 전부터는 영어 선생님과 매일 역할을 바꿔가며 실전처럼 연습했어요. 부담이 큰 만큼 정말 노력했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취소하고 싶은 유혹들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는 지금 성장근육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근육에 상처가 날 정도로 운동해야 근육이 단단해진다”며 스스로를 단련했습니다.
세계적 석학들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쌓은 그는 올해 말 미국에서 첫 번째 강의를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영어로만 하는 강의입니다. 50대 후반인 그가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셈입니다. 환갑은 보통 은퇴하고 쉬는 나이입니다. 휴식 아닌 도전을 택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여러 나라 돌아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막내가 작년에 고3이었어요. 아이들 다 스무살 넘었고 독립했으니 이젠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잖아요. 제 강의가 해외에서도 통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지금도 새벽 네시 반이면 기상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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