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여행기 ‘여로’ 펴낸 이묵돌 작가
“끊임없이 눈 치우던 모습 보고
다신 도망치지 않을 용기 얻어”
“도망치고 싶어요.”
지난해 초 이묵돌(필명·29) 작가는 마감을 재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이렇게 토로한 뒤 러시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반복되는 일상, 기계적인 원고 마감, 나아지지 않는 경제 형편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그해 2월 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서쪽으로 나아갔다. 설원에서 얼어 죽으면 어떠랴 싶었다.
그러나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택시기사에게 사기당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일주일간 격리됐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여행 에세이 ‘여로’(김영사·사진)의 이야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8일 만난 이 작가는 “지난해 3월 8일 귀국했다. 한 달 만에 멀쩡히 살아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저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절 말릴 가족도 없었거든요.”
이 작가는 2013년부터 페이스북에 ‘김리뷰’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 영화 게임 책 등 주제와 형식에 제한이 없는 독특한 리뷰는 큰 인기를 끌어 구독자가 한때 45만 명에 달했다. 2016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 ‘리뷰 리퍼블릭’을 만들었으나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실패했다. 이후 이묵돌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메가스터디북스·2020년) 등 10권 이상의 책을 냈지만 그에게 글쓰기는 점점 노동으로 변해갔다.
“먹고살려고 책을 썼어요.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기 낯부끄러웠죠.”
여행 중 그의 마음을 바꾼 건 ‘사람’이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던 도어맨, 서류를 잃어버려 허둥지둥하던 그를 관공서에 데려다준 중년 여성, 러시아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좋아하던 숙소 주인 등 낯선 이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모습에 그는 삶의 이유를 조금씩 찾게 됐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중년 남성 안드레이가 ‘더 배워야 한다. 그래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9년 전 자퇴했던 대학에 재입학했습니다.”
여행이 무엇을 바꿨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어느 새벽, 시베리아 한복판의 간이역에서 끊임없이 눈을 치우는 한 남자를 봤어요. 그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여행에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적이고 가혹해 보이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신 삶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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