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폴란드의 한 공연장에서 한바탕 ‘굿판’이 벌어졌다. 국악밴드 ‘악단광칠’이 대금, 피리, 아쟁, 가야금 등 한국의 전통악기와 황해도민요 가락으로 편곡한 우크라이나의 행진곡 ‘오, 초원의 붉은 가막살 나무여’를 부르자, 관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구슬피 우는 듯한 대금과 아쟁 소리에 맞춰 두 손을 높이 든 채 좌우로 몸을 맡긴 관객들의 몸짓이 마치 파도치듯 객석을 가득 메웠다. 한바탕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왔을 때, 한 외국인 관객이 그들에게 다가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딸이 지금 우크라이나에 있어요. 당신들의 음악이 나를 울렸습니다.”
지난해의 절반을 북미, 유럽, 중동 등 해외 투어 일정으로 분주하게 보냈던 악단광칠이 올해 아랍에미리트와 미국 투어를 마치고 7일 귀국했다. 김약대(대금), 이만월(피리·생황), 그레이스 박(아쟁), 원먼동마루(가야금), 전궁달(타악), 선우바라바라밤(타악) 등 국악기 연주자 6명과 3명의 소리꾼(홍옥, 유월, 명월)으로 꾸려진 악단광칠은 기타나 드럼 등 서양 악기 없이 오직 전통악기를 고수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뭉쳐 ‘광칠’이란 이름을 붙였다.
16일 서울 용산구 연습실에서 만난 단장 김약대(본명 김현수·41)와 선우바라바라바라밤(본명 선우진영·30), 홍옥(본명 방초롱·26), 유월(본명 이유진·28)의 얼굴에선 지친 기색 없이 활기가 느껴졌다. 이들은 “오히려 해외 투어에서 큰 힘을 얻었다”며 웃었다.
2021년과 지난해에 이은 세 번째 미국 투어에 나선 이들은 “관객의 반응이 달라졌다”며 놀라워했다. 선우바라바라바라밤은 “이전까지는 우리 음악을 알리러 갔다면 올해에는 우리를 알아봐주고 우리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한 판 굿을 벌이고 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너희 밴드 이름을 들어 봤다’며 먼저 와 반겨주고, 악단광칠의 무대 의상을 그대로 따라 입은 관객들도 곳곳에 보였어요. 공연이 끝나고 나면 ‘너희들의 음악에 마음을 위로 받았다’며 식사를 대접한 관객도 있었죠.”(선우바라바라바라밤)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서 펼쳐진 이들의 공연 영상이 지난해 1월 19일 유튜브에 공개된 것이 계기였다. 콜드플레이, 아델, 방탄소년단(BTS)과 같은 세계적인 팝스타가 거쳐 간 이 프로그램에서 펼친 무대를 통해 악단광칠의 음악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
해외 관객들이 익히 아는 ‘K-POP’과는 전혀 다른 가락인데도 악단광칠의 음악이 통하는 이유는 뭘까. 홍옥은 ‘굿 스피릿’을 이유로 꼽았다. 그는 “전통 굿판을 가보면 음악은 거들 뿐 결국에는 다 같이 하나가 되는 판이 펼쳐진다. 악단광칠의 음악은 관객이 우리가 깔아놓은 판에서 하나가 될 때 완성된다”고 했다. 이들은 언어나 문화가 전혀 다른 해외 관객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 나라의 대표적인 명곡을 한국 전통악기로 편곡해 선보인다.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다.
“음악뿐 아니라 언어로도 외국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 숙소에서 만난 현지인들에게 그 나라 말을 배우고 익혀요. 굿판을 벌이는 무당이 계속 말을 걸 듯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싶어서요. 관객을 무대로 이끌어 같이 한 판을 벌이려는 ‘굿 스피릿’이야말로 해외에서도 먹히는 우리의 매력 아닐까요.”(홍옥)
요즘 한국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이들은 20일 전북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리는 개원 10주년 개막 공연 피날레 무대에 오른다. 전통 국악을 전공한 이들에게 이 무대는 더욱 각별하다. 유월은 “해외 공연보다 국내 공연이 더 반갑다. 우리에게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라고 말했다. 서도민요를 전공한 유월은 “내 전공은 국악 중에서도 비주류라 설 수 있는 무대가 거의 없었다. 노래를 너무 하고 싶어 악단광칠에 합류한 덕분에 이제 한국에서도 내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와 기회가 생겼다”며 웃었다.
이번 무대에선 지난해 말 만든 신곡 ‘MOON 굿’을 포함해 총 3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동해안지방의 무당들이 춤을 추며 벌이는 ‘문굿’에서 영감을 받은 이 곡은 해외 투어 일정으로 멤버 모두가 지치고 힘들 무렵 만들었다. 홍옥은 “신곡을 작업하는데 멤버 모두 춤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출 때 가장 순수해졌던 그 느낌을 모두가 공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노래는 현실에서 도피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춤을 추면서 원래의 ‘나’를, 가장 순수한 우리를 되찾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지만, 이들이 가장 서보고 싶은 무대는 한국에 있다. 단장 김약대는 “언젠가 우리 노래를 듣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로 1만5000석 규모의 잠실체조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해외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우리가 기획한 무대에 관객들을 초청해보고 싶어요. 우리만의 음악을 듣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온 관객들로 가득 채워진 그런 무대를 꿈꿉니다.”(김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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