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 아를이 고흐가 사랑한 도시였다면, 엑상 프로방스는 폴 세잔(1839~1906)의 고향이다.
엑상프로방스 도심 북쪽 고지대인 로브 언덕에는 세잔의 아틀리에(Atelier Cézanne)가 있다. 세잔은 1902년부터 1906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매일같이 이 작업실에서 사과를 그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언덕길을 올라, 꽃이 피어있는 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지나니 세잔의 아틀리에가 나타난다.
1층엔 매표소와 아트숍이 있고, 세잔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상실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아뜰리에가 나온다. 시간마다 인원 제한이 있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방문해야 한다.
아뜰리에에 들어서자 햇살이 쏟아졌다. 왼쪽과 오른쪽 벽이 온통 커다란 유리벽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광을 좋아했던 만큼 아뜰리에에서도 햇살을 중요시했던가 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그대로 그림이 된다.
아뜰리에에는 세잔이 입었던 물감 묻은 작업복과 모자가 걸려 있다. 야외에서 스케치할 때 갖고 다녔던 휴대용 팔레트와 붓, 의자와 우산도 놓여 있다. 또한 테이블 위에는 물병과 잔, 빨간색, 노란색, 푸른색 과일이 담긴 접시가 그대로다. 하얀색 테이블보가 아무렇게나 접혀 있는 것까지 그림 속 모습이다.
테이블 뒷쪽에는 세잔이 ‘해골 피라미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했던 해골 3개가 놓여 있다. 서양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해골은 ‘메멘토 모리’(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의 모티브로, 인생의 유한함을 상징하는 소품이다. 세잔은 1897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후년들어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해골 피라미드’ ‘해골과 촛불이 있는 정물’ 등 많은 정물에서 해골을 넣어 그렸다.
또한 석고상과 십자가, 도자기 등 그림의 소품 뿐 아니라 대형그림을 그릴 때 쓰던 사다리도 그대로 있다.
1895년 7월 날짜가 쓰여진 편지도 있는데,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에게 보낸 편지였다. 마치 작가가 잠깐 외출한 듯. 구석구석 세잔의 숨결이 느껴져 지금이라도 한쪽 문을 열고 세잔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 곳에서 그린 세잔의 사과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번째 사과로 불린다. 첫번째는 이브의 사과, 두번째는 뉴턴의 사과다. 스티브 잡스의 사과를 네번째로 꼽는 사람도 있다.
청년시절 세잔은 파리의 살롱전에 번번이 떨어지고 1863년부터 1866년까지 연달아 입선에 실패했다. 파리 생활에서 세잔은 ‘물감만 떡칠한 그림’이라는 야유와 조롱을 10년이나 견뎌냈다. 1874년 첫 번째 ‘인상주의 작품전’이 열렸고 세잔은 석 점의 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그러다 그는 38세가 되던 해 낙향을 결심하는데, 이후 기존 미술평단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한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는 선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세잔의 아뜰리에는 ‘관찰’의 성지다. 그의 관찰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넘어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꿰뚫어보는 것으로 나아갔다. 세잔은 200여 점의 정물화에서 사과의 형태와 색깔을 끝없이 관찰하며 그렸다. 옆에서 본 사과, 위에서 본 사과, 아래에서 올려다 본 사과, 썩은 사과, 싱싱한 사과…
그는 이렇게 다양하게 관찰해서 바라본 사과를 한 접시 위에 담겨 있는 것으로 그렸다. 한가지 방향에서 바라본 1점 투시 원근법에 익숙한 미술계에는 큰 파문이 일었다. 이른바 ‘입체파(큐비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세잔을 ‘나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칭했다. 피카소는 실제로 세잔의 사과에 영향을 받아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피카소는 처녀들의 눈, 코, 입을 각각 다른 방향에서 쳐다보는 각도로 그린 후 한 얼굴에 넣었으니 기괴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피카소, 브라크, 앙리 마티스와 같은 화가들의 현대미술 운동으로 이어졌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와 형상에 주목했다. 그리고 사과, 물병, 접시 등 정물의 모든 형태를 기하학적인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해 추상화의 단계로 나아갔다.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의 풍경화도 마찬가지였다. 삼각형의 산과 네모난 집과 둥글거나 뾰족한 나무들… 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형태와 견고한 색채의 결합은 고전주의 회화를 넘어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잔의 아뜰리에에서 뒷쪽 로브(Lauves) 언덕길을 약 15분 정도 오르면 ‘화가들의 땅’(Terrain des peintre)이 나온다. 생트 빅투아르 산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지점이다.
세잔은 이곳에 이젤을 펴고 생트 빅투아르산과 나무와 숲, 마을 풍경을 그렸다. 지금도 생트 빅투아르 산 아래로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삼각형, 네모꼴 모양의 집들이 점점히 박혀 있다.
세잔은 친구였던 에밀 졸라와 장 바시스탕 바유와 함께 이 석회산을 오르내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세잔은 무려 유화 작품 44점과 수채화 작품 43점에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렸다.
이 곳에는 세잔처럼 생트 빅투아르 산 풍경을 그리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가이드가 세잔의 작품을 담은 판넬이 세워진 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설명을 하고 난 후 흰색 팔레트에 빨강, 노랑, 파랑, 흰색 등 몇가지 색깔의 물감을 나눠주었다. 세잔 아뜰리에를 관람하고, 스케치도 해볼 수 있는 체험형 현지의 여행상품을 신청한 사람들인 듯하다.
이러한 관광객 외에도 자신의 스케치 수첩을 꺼내놓고 펜으로 슥삭슥삭 그리고 있는 아마추어 화가들도 많이 있었다.
세잔의 나이 67세. 1906년 10월15일에 그는 이 언덕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그것이 생트빅투아르 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평상시 편두통을 앓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쓰러졌다. 누군가가 그를 세탁소 카트에 실어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다음날 그는 또 작업실에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쓰러졌고, 결국 폐렴으로 사망하게 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