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로드
홍콩의 패밀리로드를 가다
동서와 신구가 공존하는 도시… 3년 만에 빗장 풀고 제2의 개항
미식가 반기는 맛집 투어와 함께 100년 전통의 재래시장도 볼거리
“홍콩에서 볼 거라곤 뻔하지.”
“하루 정도 거쳐 가는 곳이잖아.”
썩 기대하지 않는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중 나온 가이드 미셸 언 씨가 현지 광둥어로 ‘음꺼이(唔該)’부터 가르쳐준다. 아침 인사인 ‘조우싼(早晨)’이나 감사하다는 말인 ‘또제(多謝)’보다 먼저. 음꺼이는 홍콩에서 마법의 단어다. ‘실례합니다’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가 다 들어 있는 만능 ‘치트 키’다. 서울 화교 출신인 미셸의 의도는 명료했다. 서울처럼 홍콩 인파 속을 걷다 보면 가장 많이 듣고, 해야 될 말이란 것. 불안과 긴장 모드가 저절로 켜진다.
●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
홍콩국제공항이 있는 츠례자오섬에 바싹 붙어 있는 란타우섬의 홍콩 디즈니랜드로 향한다. ‘한국에서도 가지 않던 테마파크를….’ 비까지 추적추적 내린다. 투명우산을 챙겨 들고 마블 유니버스와 맞닥뜨린다. 홍콩 디즈니랜드는 디즈니와 마블의 세계관이 어우러진 곳이다. 마침 어벤져스 군단이 총출동하는 ‘마블 슈퍼 히어로 시즌’(6월 22일까지)이다.
투모로랜드에서 어벤져스 차량과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토르, 스파이더맨, 앤트맨, 와스프, 캡틴 마블, 블랙 팬서, 슈리, 스타로드, 가모라, 그루트, 닥터 스트레인지와 웡의 라인업이 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을 빼닮았다. 마블 코스튬을 입고 와서 선착순 제공하는 히어로 배지를 받으면 뉴 히어로로 인정받아 어벤져스와 나란히 행진하고, 스테이지에서 초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에 함께 등장할 수 있다.
여전히 굳어 있는 기자의 마음이 열린 것은 뜻밖에도 백설공주와의 만남 때였다. 오래전 읽었던 얘기라 이제 기억 속에서도 가물가물한 공주님은 활짝 웃으며 다가와 팔짱을 낀 채 포즈를 취해줬다. 동심을 불러낸 건지, ‘아재 감성’을 자극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제 만사 오케이다. 아이언맨 버거와 인피니티스톤 젤리소다 등 마블 테마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마블 숍들을 둘러본다.
어두워지자 캐슬 오브 매지컬 드림스에서 펼쳐지는 3차원(3D) 프로젝션이 시선을 압도한다. 40여 개의 디즈니 스토리를 스크린, 매핑, 분수, 레이저, 조명, 불꽃, 폭죽 등 사용 가능한 모든 붓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용인 에버랜드보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디테일이 살아 있는 곳. 제대로 즐기려면 리조트 내 디즈니호텔에서 숙박하면 된다. 이 밖에도 오션파크, 노아의 방주 등은 가족 여행객이 가봐야 할 필수 코스다.
● 도시 자체가 건축박물관
홍콩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와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 짓기보다는 더하기를 선호하는 문화 덕분이란다. 숙소인 주룽반도 침사추이의 페닌슐라 호텔이 그랬다. 1928년 오픈해 100주년을 눈앞에 둔 이 호텔은 7층인 본관의 앞모습을 옛날 그대로 보존했다. 객실은 화려함보다 빈티지를 제대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튿날 뭐가 그리 급한지 미셸이 재촉을 한다. 숙소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해변 산책로 스타의 거리에선 리롄제(이연걸), 량차오웨이(양조위), 훙진바오(홍금보) 등 액션 스타들의 핸드프린트가 기자의 손보다 작은 것을 알고 놀랐다. 리샤오룽(이소룡)의 동상 너머로 펼쳐진 홍콩섬 빅토리아 하버의 스카이라인은 야경이 아닌 ‘주경’이지만 시원시원했다.
근처 우뚝 솟은 K11 뮤제아는 쇼핑몰인지 갤러리인지 헷갈리게 하는 복합 예술문화공간이다. 홍콩 굴지의 그룹사인 K11의 대표이자 세계적인 아트 컬렉터 에이드리언 청의 주도로 10년간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했다. 이 독특한 빌딩은 내부 곳곳에 창의적인 작품이 배치돼 있으며 건축물 자체가 예술품이라 할 만하다.
●맛과 멋이 어우러진 홍콩
서주룽 문화지구엔 2021년 11월 문을 연 아시아 최초 동시대 시각 문화 박물관인 M+ 뮤지엄이 있다. 250명의 다국적 큐레이터가 있으며, 운이 좋으면 한국인 부관장인 정도련 수석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일본의 세계적 설치미술가인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전과 중국 근현대 미술전인 ‘지그 컬렉션’이 눈길을 끈다.
홍콩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음식의 향연이다. 홍콩의 음식문화는 세계를 품은 미식의 멜팅 팟(melting pot)으로 불린다.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서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스타 레스토랑만 78개에 이른다. 그렇다고 복장 갖춰 입장하는 ‘별 식당’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값싸고 맛있는 로컬 식당이 널려 있다.
센트럴 지역에는 영화 ‘중경삼림’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세계에서 가장 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이걸 타고 올라가 옛 경찰청과 교도소가 있는 타이퀀을 구경한 뒤 출출해지면 근처 분식집 란퐁유엔 소호점을 찾으면 된다. 외관은 허름해도 밀크티와 프렌치토스트가 일품이다. 저우룬파(주윤발)의 단골집이다. 홍콩 누아르와는 달리 요즘 홍콩은 치안이 완벽해 야시장을 찾아가 보는 것도 추천드린다.
●빅토리아피크에서 감상하는 세계 3대 야경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야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 홍콩섬으로 간다. 주룽반도에선 해저터널과 페리의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해발 552m로 홍콩에서 가장 높은 산인 빅토리아피크에 오르는 방법 역시 트램과 버스의 두 종류가 있다. 트램은 1278m의 선로를 따라 불과 6분 만에 해발 396m에 도착한다. 올라갈 때는 오른쪽, 내려갈 때는 왼쪽에 앉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버스를 타면 하도 길이 구불구불해 약간의 멀미를 각오해야 한다. 영화 ‘영웅본색’에서 저우룬파가 감탄을 금치 못했던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야경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인생 샷을 건질 기회다.
다음 날 귀국 일정에 쫓겼지만 야우마테이 유적지와 재래시장을 가본다.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서민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야말로 로컬 지역이다. 이곳도 미리 예약하면 영어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홍콩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한 집 건너 장인과 명장이다. 대부분 건물과 가게가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명품 수제 칼, 도마부터 식재료, 과일, 육류 등 없는 게 없다.
●제2의 개항(開港)을 준비하는 홍콩
2019년 외래 관광객 5600만 명을 기록했던 홍콩은 시위와 코로나가 겹치면서 3년여 동안 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여행 제한 조치를 모두 풀고 제2의 개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홍콩관광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50만 장의 항공권을 증정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가운데 2만4000장이 한국에 배정됐다. 캐세이퍼시픽 등 4개 홍콩 국적항공사가 이벤트에 참여한다.
홍콩관광청 한국지사 홍은혜 차장은 “홍콩의 면적은 서울의 1.8배이며 녹지 비율은 70%에 이른다. 결코 하루짜리 스톱오버 관광지가 아니다. 기존의 유명 관광지 외에도 섬 투어, 산악 트레킹 등 자세히 보려면 1년도 모자란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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