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이 기쁨을 의미했던 예술을 만나다[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7일 15시 15분


우다이푸르 왕궁에서 ‘홀리’ 축제를 즐기는 마하라나 스와룹 싱 왕과 귀족들.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간 소개드렸던 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독특한 지역의 예술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인도 북부 우다이푸르 지역의 18~19세기 회화입니다.

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워싱턴 국립아시아미술관 새클러갤러리에서 특별 전시로 공개가 되었는데요. 보존을 위해 이번에 전시가 되면 몇 년 동안은 다시 밖으로 나오기 힘든 것들이라고 합니다.

제가 전시 종료 2주 전 방문해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특별한 작품이어서 사진으로라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도 인도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큐레이터 투어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를 최대한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새로 살게 된 수도를 찬양하다


해 뜨는 우다이푸르, 1722-23년 경. 사진: 미국 국립아시아미술관(NMAA).

위 작품은 인도 북부 우다이푸르 지역에서 이전까지 그려진 것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입니다. 어떤 점이 다르냐면 첫 번째,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를 그렸다는 점, 두 번째는 인물 중심이 아닌 풍경이라는 점입니다.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이나, 지난주 살펴 봤던 다빈치의 작품 같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에 보이는 그림은 사람은 아주 작게 그려져있고 마치 지도처럼 풍경이 잘 보이죠.

축제를 즐기는 왕궁, 1767년 경. 사진: 미국 국립아시아미술관(NMAA)

위 그림은 호수 위에 왕이 만든 궁전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궁전의 구조가 어떻게 됐는지 또 어떤 나무가 있었는지를 마치 기록하듯 사실적으로 표현했죠.

그림을 크게 확대해서 보시면 궁전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물론, 물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까지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때부터 우다이푸르 지역의 왕족은 사실적인 그림을 주문하기 시작한 걸까요? 바로 이곳이 왕국의 새로운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다이푸르가 수도가 된 것은 16세기 입니다. 이곳은 과거 수도보다는 비가 불규칙하게 내렸지만 산이 있어 침략을 막기에 유용했습니다.

왕국 사람들은 불리한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호수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최대한 저장했죠. 그리고 이 때 만든 호수 위에 하얀 성도 짓습니다. 그림 속 궁전이 바로 이 성이죠.

왕과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이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물이 가득한, 건조한 북서부 인도의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풍족해진 수도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회색은 기쁨의 색


우기(몬순)에 강을 건너는 왕(작품 일부). 1893년 경.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건조한 지역이었던 만큼 언제 비가 오느냐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전시된 작품을 보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회색’이 우중충한 어둠이 아니라 아주 즐겁고 기쁜 감정을 나타내는 색이었다는 점입니다.

위 그림은 비가 마구 내리는 우기(몬순)에 왕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기 때문에 하늘은 잔뜩 흐리고, 건조했던 지역이 검은 물로 가득 차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불편하거나 위험한 모습이 아니라, 아주 만족스럽고 흐뭇한 광경을 담고 있습니다.

우기(몬순)에 강을 건너는 왕(작품 일부). 1893년 경.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까지 세세하게 그어 내려서 묘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유난히 비가 풍족하게 내린 우기에는 왕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회화가 그려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색채라는 것이 문화와 지역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서양 문화권에서는 노랑색을 두려움이나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도 있죠.

빗속을 걷는 남자의 모습. 먹구름이 가득 낀 듯 온통 검은 배경이지만, 이 그림 속 인물은 아주 행복한 순간이다..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감정을 공유하며 결속을 다지다

그런데 이 때 우다이푸르의 왕족이 현실을 담은 그림을 그렸던 이유가 또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미학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첫 번째 미학적 이유는, 인도 예술의 역사와 관련이 됩니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예술이 어떠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분위기’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봤다고 합니다.

즉 종교에 관한 이야기나 인물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지형과 색채를 더욱 현실적으로 반영하면서 이 때 회화는 그곳 사람들이 공유하는 분위기를 담게 됩니다.

분위기뿐 아니라 그 지역에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땅에 대해 갖는 끈끈한 연결고리를 인도에서는 ‘바바’(bhava)라고 합니다. 새 수도를 사람들이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예술이 해 주고 있었던 것이죠.

또 인도 철학자들은 안목이 있는 사람이 좋은 작품을 보면 ‘바바’를 느끼고,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미적 경험인 ‘라사’를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작품에 완전히 몰입해 본질에 닿는 경험이 바로 ‘라사’이죠. 인도의 엘리트와 지성인들은 예술을 통해 이것을 경험하는 것을 가치있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우다이푸르 왕궁에서 ‘홀리’ 축제를 즐기는 마하라나 스와룹 싱 왕과 귀족들. 사진: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인도의 정치적 변화입니다. 18세기 북부 인도는 무굴 제국(1527~1857)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그들과 힘겨루기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우다이푸르 같은 지방 정부는 도시를 건설하고 예술을 움직여 새로운 동맹과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했죠.

위 그림에서 묘사된 것은 왕과 귀족들이 형형 색색의 안료를 뿌리며 즐기는 ‘홀리 축제’의 장면입니다. 이렇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도 유대 관계가 생겼겠죠. 그런데 축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축제를 궁정 화가가 그림으로 기록하고, 그림이 완성되면 참석자들은 궁전 내 갤러리로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들이 한 자리에서 그림을 감상했던 것이죠.

행복했던 기억을 담은 그림을 다시 한 번 보면서 참석자들은 감정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을 글로 담아 그림 뒷면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사실 지금 현대인의 일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도 즐거운 기억을 사진과 ‘인증샷’으로 남기고 되새김질을 하니까 말이죠. 물론 이 때 그림은 아주 값비싼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왕과 주변 사람들을 끈끈하게 연결해주는 이미지의 힘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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